가치관과 스타일에 따라 나눠본 통역사의 유형
커버하는 가치사슬의 조합에 따라 통역사를 여러 유형으로 나눌 수 있으며, 현장에서 얼마나 적극적인 자세로 소통의 솔루션을 제시할 것인지에 대한 선호도에 따라 유형을 고르면 된다.
통역사는 언어전문가가 아닌 이해전문가입니다. 언어의 장벽을 해결하려면 결국 다른 소통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솔루션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통역사라는 직업도 상당히 난해합니다. 그럼 통역사로서 이해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토대로 소통 전반에 대한 인사이트도 얻을 수 있을까요? 현장에서 얻은 경험과 고민을 정리해서 야매통역사만의 야매 이론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물론 Best Scenario는 클라이언트와 메시지, 상황마다 제일 잘 맞는 Input을 조합하는 것일 테지만,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사실 야매 이론 같은 건 필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솔루션을 개발하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핵심은 1) 본인이 고려할 Input의 범주를 사전에 정하고, 2) 현장에서 일관성 있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통역사 개개인마다 스타일과 선호가 있습니다만, 실제로 현장에서 여러 통역사들을 만나본 결과 각각 커버하는 가치사슬의 조합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장의 변수에 대응해서 Input 조합을 끼워 맞추는 대신, 무엇이 통역의 올바른 모습일까에 대한 관점으로 유형을 분류했습니다. 두 가지 큰 갈래에서 나뉩니다. 첫 번째는 통역사가 청취자의 이해까지 챙겨야 하는지에 대한 찬반, 그리고 두 번째는 통역 내용에 대한 통역사의 재량을 어디까지 볼 것인지에 대한 판단입니다.
두 갈래 다 어느 한쪽이 정답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통역사는 클라이언트의 메시지를 콘텐츠 차원에서 수정할 재량권이 있는가 물으시면 통역사들끼리 의견이 많이 갈립니다. 청취자의 이해 또한 통역사의 역할을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갈릴 겁니다. 1~4번을 한 선 상으로 놓고 보면, 주어진 발화를 도착어로 변환하는 ‘소극적 통역’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통역으로서 포지션을 활용하여 소통의 완결성을 챙기는 ‘적극적 통역’을 추구하느냐는 관점에서 나열해 볼 수 있겠습니다.
어떤 박스에 위치하냐에 따라 가치사슬 상으로 어떤 Coverage를 가져가야 할지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어느 Input까지 고려하고, 어떤 Input을 배제할지에 대한 대원칙도 세울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유형을 정하기 시작하면 뉘앙스적으로 왠지 ‘적극적 통역’이 옳고, 다 챙겨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일한 불변의 답은 사전에 유형을 정하는 것이고, 이를 위한 통역사로서 본인의 선호와 역량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잘하는 통역’의 해답입니다.
유형을 구분해 보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통역의 다양한 핵심가치들을 놓고 내 관점과 제일 부합하는 유형, 즉 내 스타일을 찾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유형에 대해 알고 있으면 현장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MBTI가 내 유형을 파악하는 의미도 있지만 다른 유형을 보며 나를 보완할 수 있는 방향을 찾게 해주는 것처럼요.
[1] The Machine: 클라이언트의 발화 내용만 Input으로 인정하는 통역의 유형입니다. 클라이언트가 사용한 표현 및 단어를 도착어로 최대한 보전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며, 다른 Input을 제한합니다. 동시통역사들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며, 이는 동시통역 특성상 다른 Input과 고민을 고려하기보다는 페이스를 맞춰 도착어로 Output을 내는 것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The Spokesperson: 클라이언트의 핵심 메시지를 입체적으로 이해해서 표현하는 유형입니다. 핵심 메시지에 부합한다면 과감하게 발화된 실제 워딩을 통역사 본인만의 표현과 심지어는 논리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통역하는 대상 혹은 분야에 대해 조예가 깊은 통역사들 중 이런 유형이 많으며, 아무래도 동시통역보다는 생각할 시간이 많은 순차통역에서 많이 보입니다.
[3] The Facilitator: 청취자의 반응도 통역의 Input으로 챙기는 유형입니다. 통역을 딜리버리 하며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고, 못 알아듣거나 헷갈리면 내용을 변경시킵니다. 다만 그 범위는 통역사의 개인적 판단은 최대한 배제시키고 청취자가 모르는 단어나 외부 소음으로 못 듣게 되는 등 환경적인 요인 등 명시적인 요인에 집중합니다. 대표적으로 사람 이름이 언급되었는데 청취자가 모른다면 다음에는 직함과 소속을 붙여 통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취자를 관찰할 수 있는 환경에서 유효합니다.
[4] The Mastermind: 논의 자체가 생산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전방위적으로 높은 재량권을 가지고 챙기는 유형입니다. 통역의 주제에 대한 실제 담당자가 통역을 겸해 고위급 회의에 참가하는 경우가 제일 잦습니다. 혹은 인하우스 통역이 오랜 기간 주제전문성과 신뢰를 쌓으면 가능합니다.
실제로 어떻냐고 물으신다면 대부분의 통역사들은 2번과 3번 사이에서 본인의 자리를 찾습니다. 현장에 따라 유연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1번이나 4번 같은 비교적 극단적인 유형에 완벽히 부합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앞선 포스팅에서 많이 언급된 것처럼 통역사들은 항상 현장에서 ‘알잘딱깔센’하며 ‘잘하는 통역사’가 되기 위한 답을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