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한 북태평양 한 가운데 위치한 하와이 섬은 천혜의 관광지이다. 동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무역풍에 의해 일년 내내 섭씨 25도 전후의 쾌적한 날씨가 이어지며 ‘마우나케아산’과 ‘와이키키 해변’ 등 이국적인 풍경을 보고 즐길 수 있다. 하와이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는 무엇보다도 오아후 섬에 있는 진주만인데 좁은 만의 입구를 지나면 한 가운데 포드 섬이 나오고 이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각종 항만 시설과 통합 군기지가 위치해 있다. 또한 진주만 주변에는 전쟁과 관련한 각종 박물관이나 기념관 등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포드 섬 바로 우측에 있는 하얀색 건물이 방문자들의 눈길을 끄는 곳이다. 특별한 장식도 없이 단순하지만 강렬한 하얀색 외관에 성조기가 펄럭이는 이 ‘해상 건물’에는 특이한 점이 한가지 있다. 건물의 위에서 바라보면 낮은 수면 아래에 건물과 십자 대칭으로 배 한 척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다. 이 배의 이름은 ‘애리조나호’이고 해저에 가라앉은 사연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80년 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애리조나호는 1915년 6월에 취역 한 미 해군 소속의 전함으로서 만재 배수량 29,000톤을 자랑하는 거대한 ‘펜실베니아급’의 2번 함이었다. 1917년 4월에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했지만 애리조나호는 전투에 투입되기 보다는 미국 동부에 머물면서 훈련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1918년 11월 전쟁이 종료된 후에는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호위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후 쿠바의 관타나모 기지, 파나마 운하 등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고 1921년 이후에는 태평양 함대에 배속되어 캘리포니아의 지진 등 재난 구조 임무에 투입되기도 한다. 애리조나호는 1929년에 개장과 현대화 작업을 진행했는데 주포의 사격 경사를 높였고 신형 마스트를 장비했으며 갑판에 특수처리강을 사용해 공격력과 방어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애리조나호는 배수량 38,000톤에 달하는 당시 기준으로 ‘초 거대함’으로 재탄생 했으며 미 해군의 자부심이 된다. 1930년대에는 통상적인 훈련과 순항 등으로 임무를 수행했는데 급변하는 국제 정세는 애리조나호를 운명의 장소로 이끌게 된다. 1940년 4월, 미 해군은 ‘다가오는 적’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태평양 함대를 캘리포니아의 샌디에이고에서 태평양 한 복판인 하와이로 전진 배치하도록 결정했다. 이 미래의 적은 바로 ‘대동아공영권’을 꿈꾸는 ‘일본 제국’이었는데 애리조나호 또한 태평양 함대의 일원으로서 하와이의 진주만으로 이동하게 된다.
1940년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후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본토가 독일에 점령당한 상황에서 괴뢰 정부인 비시 정부는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유심히 쳐다보는 국가가 있었는데 바로 동남아 진출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은 1937년부터 시작된 중일전쟁의 늪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이 와중에 미국의 여러 제재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석유였고 이를 위한 진격 발판으로 베트남이 필요했다. 1940년 9월 일본군은 사실상 무혈로 베트남에 진주하게 된다. 분노한 미국은 일본의 의도에 대해 이미 파악을 하고 중국에 대한 차관과 지원을 강화한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가 일본에 대해 ABCD 포위망을 형성했고1941년 7월과 8월에 일본 자산동결과 석유 금수 조치에 들어간다. 겉으로는 미국과의 외교적 회담이 진행되며 대화를 진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일본군은 이미 공격 계획을 가다듬고 있었다. 목표는 미국 태평양 함대가 있는 진주만이었고 이곳에서 미 함대를 격멸 후 신속하게 동남아를 점령하여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 들인다는 전략이었다.
1941년 12월 7일은 일요일이었고 아침 7시에 대부분의 하와이 주민들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이날 새벽부터 진주만 북동쪽 200마일 해상에는 엄청난 규모의 함대들이 집결해 있었고 6척이나 동원된 항공모함에서 전투기, 함상공격기, 급강하 폭격기 등 각 종 전투기들을 이함시키고 있었다. 이들의 동체에는 붉은색의 원이 그려져 있었는데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제국 해군은 미국 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기수를 남으로 향하여 맹렬히 돌진했다. 미군이 경계를 위해 설치한 레이다도 이들을 발견했지만 관측병이 아군기인 줄 알고 별다른 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일본군 편대가 진주만에 도착하니 미국 함대는 마치 정렬되어 관함식을 준비하는 듯 조용히 정박해 있었다. 일본 해군의 0식 (일명 제로) 함상 전투기와, 97식 함상공격기, 99식 급강하 폭격기들이 진주만을 가로 지르며 미국 함대를 유린했다. 애리조나호에는 07시 55분에 함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고 8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97식 함상공격기 편대가 집중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애리조나호는 순식간에 4발의 철갑 폭탄을 맞게 되었고 불길에 휩싸였다. 8시 6분이 되자 폭탄 하나가 2번 주포 부근에 명중했는데 갑판을 뚫고 아래의 포탄 저장고까지 도달했다. 이 폭탄이 결정타가 되었는데 주변의 모든 포탄까지 유폭을 시키며 엄청난 대폭발을 일으켰고 배를 반으로 갈랐다. 배의 마스트가 급격히 기울면서 애리조나호는 침몰해 갔고 승무원 1,512명 중 1,177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진주만 공습의 전체 사망자는 2,334명이었는데 그 절반의 인원이 애리조나호 한 배에서 사망한 것이다. 희생된 사람 중에는 제1전함대 사령관인 ‘아이작 키드’와 배와 운명을 함께한 애리조나호 함장 ‘프랭클린 반 발켄버그’도 있었다. 이들은 사후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진주만 기습은 미국인들에게 '비겁한 일본인'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고엄청난 분노를 야기시켰는데 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말 그대로 잠자는 거인을 깨운 사건이었다. 미국에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일본군이 진주만 한 쪽에 있던 거대한 유류 저장고를 놓쳤다는 점이다. 이 유류가 없었다면 미국은 한동안 함대의 가동이 불가능했을 상황이었다. 진주만에서 침몰한 전함 6척은 추후 대부분 인양되어서 일선에 복귀했지만 너무나 큰 피해를 입은 애리조나호는 예외였다. 사용 가능한 주포 등은 분리되어 오아후 섬에서 해안포로 역할을 하였고 함 자체는 침몰된 그 자리에 계속 방치되었다. 시간이 흘러 1962년이 되어서야 침몰된 자리 바로 위에 흰 색의 기념관이 세워졌다. 이곳 기념관 옆에는 애리조나호에서 세어 나오는 기름 방울을 아직도 볼 수 있다. 흔히 ‘애리조나호의 눈물’이라고 부르는 이 기름 방울은 당시 젊은 나이로 죽어간 수많은 수병들에 대한 애도의 징표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