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 (좌), 아르노 브레커 (우) 와 함께 에펠탑에서 포즈를 취하는 히틀러
1940년 6월 23일 프랑스 국민들 특히 수도인 파리 시민들의 마음은 대단히 복잡했다. 많은 이들이 두려움, 원망 그리고 패배감에 따른 치욕스러움 및 무력감 등이 복합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바로 전 날인 6월 22일에 프랑스군이 신속하게 진격하는 독일군에게 공식 항복함에 따라 프랑스 전투가 막을 내린 것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치욕감에 더불어 독일 점령 당국은 프랑스 점령 첫 날, 파리시에 특별한 명령을 내린다. 모든 시민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내에 나오지 않도록 요구된 것이다. 그 날 파리시에는 정적이 흘렀고 대부분의 시내 교통이 멈추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 무리가 아침 6시부터 자동차로 파리시 중심가를 누비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은 점령군인 독일 측 일행이었고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승리를 만끽하듯이 거만한 표정으로 파리시의 주요 명소를 돌아다녔다. 이들의 중심에는 벤츠 G4오픈카에 앉은 코트 차림의 한 사내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세계대전의 포문을 연 히틀러는 이제 숙적인 영국, 프랑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특히, 육군 최강국인 프랑스와의 일전은 독일의 많은 장군들이 히틀러를 만류하고 암살 쿠데타를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위험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독일군 최고 지휘부는 엘리트 자원을 투입하여 작전 입안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색 계획 (Fall gelb)’이라 불리던 작전 입안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중립국 벨기에를 통해서 공격하는 것은 1차대전 시 ‘슐리펜 계획’의 재판이었고 프랑스 동부 쪽은 모든 것을 예상한 프랑스군이 마지노선을 건설하여 철통방어 중이었다. 입안 계획은 상상력이 결여되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히틀러를 비롯한 누구의 눈을 통해서 보아도 이길 수 있는 작전이 아니었다. 이때 독일군에게 마치 구세주처럼 한 명의 장군이 나타나게 된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은 ‘폰 (Von)’이 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긍지 높은 프로이센 귀족출신의 장군이었다. 1차 대전 시 프랑스의 베르뒹과 솜므에서 악몽 같은 참호전을 몸소 겪으며 이의 돌파 방안을 연구하게 되었고 전차라는 무기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된다. 만슈타인은 전후 착실히 승진을 거듭했고 폴란드전 이후에는 프랑스 침공 조력부대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장군’의 A집단군 참모장이 되었다. 그는 진부한 기존 황색 계획 대신에 벨기에와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아르덴 산지로 대규모 전차부대를 침투시키고 적을 배후에서 역포위 하는 작전을 입안한다. 하지만 그의 창의적인 작전은 보수적인 참모본부의 엄청난 반발을 사게 되었고 만슈타인은 폴란드 후방의 38군단장으로 좌천된다. 참모본부는 아르덴 산지가 전차가 기동하기에는 너무 험준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후방으로 좌천되었던 그가 연줄을 통해 히틀러와 단독 면담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는 짧은 시간에 그의 계획을 설명하며 황색 계획에 질려 있던 히틀러를 단번에 매료시켰다. 이후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그의 계획인 ‘낫질 작전’ (Sichelschnitt: 영불 연합군을 마치 낫질 하듯이 쓸어버린다는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 채택되었다. 독일군은 1940년 5월 10일에 벨기에,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공격했는데 프랑스군은 그들의 계획에 따라 전군을 벨기에, 네덜란드 방향으로 급히 투입했다. 이 때 폰 룬트슈테트 장군의 독일 A집단군이 아르덴 산지를 뚫고 연합군 배후에서 쾌속 진격하기 시작했는데 영불 연합군은 후방서 밀려오는 독일군에 어리둥절했고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불과 2주 남짓한 사이에 독일군 전차부대는 대서양에 도달했고 영국군은 대부분의 파견 병력을 프랑스 됭케르크 항구를 통해 철수시킨다. 영국군이 떠난 이후 독일군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잔여 프랑스군을 차례차례 격파했고 결국 프랑스는 6월 22일에 파리 근교 콩피에뉴 숲에서 독일에 항복하게 된다. 양국의 항복 조인식이 열린 곳은 한 열차 객실이었는데 1차대전 시 독일이 항복 조인식을 한 곳이 바로 그 열차 객실이었다. 히틀러가 프랑스의 자존심을 짓밟기 위해 일부러 같은 장소에서 실시하도록 명령한 것이었다.
항복조인식 다음 날 아침에 히틀러는 점령된 파리 시내 투어에 나섰다. 투어는 '파리 오페라하우스' 부터 시작 되었는데 고전 양식을 좋아하는 히틀러에게 이 곳은 많은 인상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다음으로 방문한 ‘마들렌 성당’은 그다지 총통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이후 샹젤리제 쪽으로 방향을 튼 일행은 개선문 바로 아래에 있는 무명용사 기념비에 정차했다. 히틀러는 같은 군인으로서의 감정이 이입된 듯 잠시 멈추어 서 기념비를 응시했고 이후 다시 출발했다.
다음 목적지는 ‘트로카데르 광장’ 쪽이었는데 이 곳의 정면은 에펠탑의 시원한 전경이 보이는 곳이었다. 히틀러는 이 곳에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히틀러가 총애하는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와 조각가인 ‘아르노 브레커’가 함께 했다. 그의 표정은 자부심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1차대전 때 전 독일군이 4년 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자신은 불과 한 달 만에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장 컸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이날 투어 중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고 많은 선전 사진들을 촬영했다. 히틀러는 ‘하켄 크로이츠’ (나치 깃발)가 계양 된 에펠탑에 올라가고자 했지만 할 수 없었는데 프랑스 당국이 독일 점령 이전에 엘리베이터 케이블을 절단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히틀러는 그가 존경하는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엥발리드’와 ‘팡테온’ 그리고 ‘뤽상부르 공원’ 등을 둘러보았다. 수행원들은 히틀러가 나폴레옹의 무덤을 방문한 것이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점령했을 때 포츠담의 ‘프리드리히 대제’ 무덤을 둘러본 것과 유사한 역사적 상황임을 상기하기도 했다. 시내 북쪽의 ‘샤크레 쾨르 사원’을 마지막으로 2시간이 조금 넘는 투어는 끝을 맺었고 히틀러는 ‘르 부르제 공항’에서 열광하는 독일군들에게 둘러 쌓여 담소를 나누었다. 히틀러는 곧장 벨기에의 야전 지휘소로 돌아갔고 이후 다시는 파리에 오지 않았다.
히틀러는 귀환 이후 건축가인 알베르트 슈페어를 불러 담소를 나누었는데 파리의 아름다움에 대해 칭찬했고 동시에 베를린을 더 멋있게 만들 생각임을 전달했다. 그는 전쟁 중임에도 상당한 자원을 할애하여 미래의 베를린인 ‘세계 수도 게르마니아’ 건설 계획에 몰두했다. 하지만 전쟁이 독일에게 불리하게 돌아 감에 따라 게르마니아 건설 계획은 곧 사장된다.1944년 8월, 연합군의 반격으로 궁지에 몰린 히틀러는 파리를 초토화시킬 것을 지시했는데 이는 그나마 제정신이었던 ‘디트리히 폰 콜티츠’ 같은 신념있는 장군의 반발로 무산된다.
한때 예술가를 꿈꾸었던 히틀러에게 1940년 6월 23일의 파리는 잔인하고 피로 얼룩진 그의 일생에서 아마도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