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트시에서 합동 퍼레이드를 참관 중인 독일 (하인츠 구데리안)과 소련 (세묜 크로브쉐인)의 장성들
1939년 9월 17일, 독일군의 맹공을 받으며 고전하고 있던 폴란드에게 국가의 사형선고와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동쪽 국경에서 무려 60만 이상의 소련군이 폴란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암울한 뉴스였다. 폴란드군은 독일군을 제1의 주적으로 상정하여 모든 방어 계획을 세워 놓았는데 소련에 대한 대비책이라고 해봐야 고작 2만명 남짓한 국경 수비대원 말고는 사실상 전무했다. 폴란드군은 사방에서 진격해 오는 소련군에 압도 당하기 시작했고 사실상 저항도 못하고 무너지고 있었다. 폴란드 국민들 역시 극도의 공포와 충격으로 거의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서쪽에서 공격하는 독일군을 피해 동쪽을 향해 피난길에 오르던 수많은 폴란드인들은 가던 발길을 멈추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상황 이었다. 좌익 성향이나 유대계 폴란드인들만이 그나마 나치보다 소련군이 낫다고 생각하여 도망쳤을 뿐이었다. 10월 6일에 폴란드의 모든 저항은 종료 되었고 독일군과 소련군은 8월 23일에 합의한 독소불가침 조약대로 자신들의 영토 이권을 챙겼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104년 만에 수립된 ‘신생 폴란드 공화국’은 다시 한번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양국은 폴란드 내에서 합동으로 승전 퍼레이드를 개최하는데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사진 속에 보이는 동부 브레스트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이 도시는 이미 독일군이 며칠 전 점령한 상태였는데 독일군은 행사를 위해 19군단장이자 전격전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이 참석했고 소련군 대표로는 29경전차여단장인 ‘세묜 크로브쉐인’ 장군이 참석했다. 둘은 서로 악수를 하며 입가에 웃음을 띠고 사진을 찍게 되는데 전세계 사람들은 극좌 공산주의 국가와 극우 전체주의 국가의 협력 모습을 보며 충격에 빠졌다. (더구나 크로브쉐인은 나치가 그토록 증오하는 유대인 출신이었다.) 양 국의 병사들은 퍼레이드 전후에 담배 및 기념품을 교환하고 같이 사진을 찍는 등 상당히 우호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 달여 전에 맺은 양국의 불가침 조약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시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모습을 통해 ‘악마와 악마가 손을 잡았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독일과 교전 중인 영국과 프랑스 역시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이들 입장에서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폴란드는 서유럽 우방국들의 국경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양국은 이제서야 동원령을 내리고 병사들을 모집하여 아직 제대로 된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영국은 훗날 소련과의 협력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고 최대한 소련 측에 대한 자극을 자제하고 있었다.
한편, 독일과 소련에 의해 점령 당한 이후의 폴란드는 점차 지옥으로 변하고 있었다. 우선 독일은 폴란드 인구의 거의 20% 가량을 차지했던 유대인들을 별도 등록하고 노란색 다윗의 별을 달도록 강제했다. 이후 1940년부터는 바르샤바, 크라코프 등 각지의 게토에 유대인들을 수용하기 시작 했는데 소위 ‘최종적 해결’을 위한 선제 조치였다. 이러한 결과로서 폴란드 유대인의 90% 이상이 전쟁 동안 나치에 살해 당한다. 소련 측 점령지에서는 지식인, 군인 및 우파 지도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특별 조치’ 대상이 되었다. 특히, 1920년에 폴란드를 공격해오는 소련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던 폴란드 국민군 출신과 그들의 가족도 포함 되었다. 이것은 당시 소련군을 지휘하다 바르샤바 목전에서 대패한 스탈린의 개인적 복수이기도 했다. 이들은 소련 내 시베리아를 포함한 각지의 수용소로 이송 당했는데 그 수가 최대 100만 이상에 달한다고 추정만 되고 있다. 이러한 경우 중 최악의 사건으로 역사 속에 기록 된 것이 바로 ‘카틴 숲 학살’ 이라는 폴란드군과 지식인 들의 집단 학살이었는데 소련군의 포로가 된 폴란드 장교들 2만 2천 명 이상이 살해 당했다. 냉전이 끝나기 전까지 카틴 학살은 소련 및 공산당 휘하의 동구권에서 금기 시 된 주제였다.
독일과 소련 양국의 협조는 이후로도 지속 되었다. 소련은 자국도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독일에게 지속적으로 식량과 원자재를 공급했고 동부 전선에 강력한 우호국을 둔 독일은 거칠 것 없이 서유럽을 유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측할 수 있었듯이 이 기묘한 협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1년 6월 독일이 암호명 ‘바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을 공격하며 불가침 협정을 파기한 것이다. 이후 양국은 사상 최악의 살육전을 벌이며 수천만 명의 희생자를 내게 된다.
독일과 소련의 협력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당장의 원수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와중에 폴란드 같은 약소국은 언제든지 강대국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무자비한 실상을 깨닫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