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28년전 쉰들러 리스트를 처음 보았을 때의 흥분과 감동을 잊지 못한다. 영화는 3시간 분량의 상당한 장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모든 감각을 집중하게 만들었고 잠시도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나 자신이 마치 죽음을 앞둔 영화 속의 유대인들인 것처럼 감정이 이입되어 극도의 긴장감 속에 시청을 했다. 두 번째 보았을 때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나 군인들의 복장, 무기 등 좀 더 개인적 관심사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이후 수차례 반복해서 영화를 보면서 좀 더 새로운 것 들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영화에 등장하는 당시의 다양한 노래들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노래들은 대부분 당시 독일 및 동유럽권에서 유행하던 대표적인 곡들로 구성 되어있다. 이 노래들 중 많은 곡들이 당시의 시대상만큼이나 기구한 배경 및 사연을 가지고 있다. 지금부터 영화에 나오는 7곡의 노래들에 대해 살펴보자.
쉰들러 리스트 중 한 장면
첫 번째 노래, 글루미 썬데이 (Gloomy Sunday)
쉰들러 리스트의 도입부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한 남자가 한껏 외출을 준비하는 장면이 나온다. 담배 연기 속에 셔츠와 정장을 꺼내고 넥타이와 커프스 단추를 준비하는데 마지막에는 정장에 ‘나치당원’ 뱃지를 부착하여 이 사람이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알게 해준다. (물론 이 사람은 오스카 쉰들러다) 이때 라디오에서는 줄곧 구슬픈 바이올린 선율이 흘러나오는데 이 곡이 바로 지금부터 얘기하고자 하는 ‘글루미 썬데이’다.
글루미 썬데이는 1933년에 헝가리의 유대계 작곡가인 ‘레죄 세레시’에 의해 발표되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세레시는 줄타기 곡예나 희극배우 로서 활동하던 중 피아노와 작곡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1920년대부터는 여러 곡을 직접 작곡했고 부다페스트의 까페에서 피아노 연주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세레시의 동료이자 같은 유대계 시인이었던 ‘라슬로 자보르’의 시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연인의 죽음에 슬퍼하며 종국에는 화자의 자살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세레시는 부다페스트의 작은 까페에서 이 곡을 즉흥적으로 연주했는데 당시 손님 중 한 명이 이를 악보로 적어서 그에게 주었다. 이 곡의 악보가 점차 팔리면서 노래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불행히도 노래가 유명해진 이유는 사람들의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 이 곡을 들은 후 극도의 우울감을 못 이기고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유서와 함께 글루미 썬데이의 악보를 옆에 놓고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노동자, 하녀부터 정부고위관료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글루미 썬데이의 멜로디가 자살을 부추긴다는 ‘도시 괴담’ 수준의 루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글루미 썬데이는 ‘헝가리의 자살노래’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얻은 체 유럽을 넘어 전세계로 퍼져갔다. 당시는 세계 경제대공황이 절정이던 시기로 실업, 파산 및 가난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이 넘쳐나던 때였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글루미 썬데이를 들으면서 더욱 비참함과 슬픔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1935년 헝가리의 유명 가수이자 영화배우인 ‘카탈린 카라디’에 의해 녹음된 이후 1936년에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그리고 심지어는 일본어로까지 불리어졌다. 1937년에는 망명 러시아 탱고가수 ‘표트르 레셴코’에 의해 러시아어로 녹음되는 등 전세계적인 인기를 모으게 된다. 글루미 썬데이의 녹음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미국 재즈 가수 ‘빌리 할리데이’가 부른 버전일 것이다. 1941년에 나온 이 버전에 대해 영국의 BBC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금지시킨다.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곡조로 인해 전쟁 중 국민과 군대의 사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한편, 이 곡을 작곡한 세레시는 자신의 노래가 전세계적인 히트를 치는 동안 미국 등지로 가서 금전적인 부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조국 헝가리에 남는다. 하지만 이 선택은 그의 운명을 예상치 못한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된다.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동맹국으로서 우파인 호르티 정권 하에서 나름의 유대인 박해가 자행되었다. 세레시는 직업을 잃었고 극우 청년단체인 ‘애로우단’에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 이후 우크라이나에 끌려가 광산에서 강제노역을 하게 되었고 여러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겨우 생존하게 된다. 불행히도 그의 어머니는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이후 헝가리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지만 그의 보헤미안적인 기질은 부르조아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정권에 환영 받지 못했다.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는 그의 노래에 대한 저작권료가 나날이 쌓여가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조국 헝가리를 떠나지 못했다. 1956년에 ‘헝가리 의거’가 일어나고 그에게 한 번 더 출국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때는 이미 모든 걸 체념했고 더 이상 떠나려 하지 않았다.
1968년 1월 ‘뉴욕타임스’에는 한 부고 기사가 실렸는데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한 남자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었다. 부고 기사의 주인공은 글루미 썬데이를 작곡한 ‘레죄 세레시’였고 그의 우울한 노래가 암시했던 대로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굴곡 많은 삶을 살다 간 한 유대인 예술가의 마지막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