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외출을 시작한 오스카 쉰들러는 나치 친위대 장교들로 가득 찬 한 클럽에 들어가게 된다. 고액의 팁으로 웨이터를 매수한 그는 마치 맹수가 먹이감을 노리듯이 클럽 안의 다양한 사람들을 주시한다. 클럽의 홀에서는 사람들이 ‘한 탱고 곡’에 맞추어 춤을 추는 가운데 쉰들러는 먹이 감인 나치 장교들과 합석하여 이들을 구워삶고 있다. 계속 흘러나오는 ‘그 탱고 곡’의 잔잔한 선율 속에 클럽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고 있었다.
리우의 셀라론 계단에 있는 까를로스 가르델의 그림 타일 (필자 촬영)
아르헨티나 출신의 가수이자 영화배우였던 ‘까를로스 가르델’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슈퍼스타였다. 원래 그의 고향은 프랑스 남부의 툴루즈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유부남과의 관계에서 낳은 사생아로 태어났다. 프랑스식 본명은 ‘샤를 로뮈알 가르데’였는데 ‘가르데’는 어머니의 성에서 따온 것이었다. 19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20대의 젊은 나이로 혼외 자식을 키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모녀는 가르델이 3세 때인 1893년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어머니는 다림질 등의 일을 통해 생계를 영위하게 되었는데 생활은 힘들었지만 사람들에게는 미망인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적어도 프랑스와 같이 미혼모로 손가락질 받는 일은 없었다.
가르델은 이곳에서 샤를의 스페인어 이름인 ‘까를로스’로 불리었다. 노래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클럽이나 까페 등에서 노래하며 중저음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점차 이름을 알렸다. 그러던 그에게 본격적인 도약의 시기가 찾아오는데 1917년 ‘나의 슬픈 밤 (Mi noche triste)’이라는 탱고 곡을 통해 아르헨티나를 넘어 라틴아메리카 일대에서 엄청난 히트를 치게 된 것이다. 당시 약 만 장의 레코드가 팔렸는데 오늘날 기준으로 본다면 ‘밀리언셀러’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이후 가르델은 그의 매력적인 바리톤 목소리를 통해 중남미 여러 나라 및 미국과 유럽에서까지 콘서트를 열게 되었다. 더불어 뮤지컬 배우로서 헐리웃까지 진출하여 국제적인 ‘엔터테이너’가 된다.
가르델은 작곡에도 소질이 있었고 여러 명곡들을 작곡하게 되는데 이에 어울리는 멋진 가사를 써 준 최고의 파트너가 있었다. 그 파트너는 ‘알프레도 르 페라’라는 브라질 상파울루 출신의 극작가이자 작사가였는데 ‘르 페라’의 가사를 통해 가르델의 곡은 더욱 빛을 발한다. 두 명의 콤비는 ‘귀향 (Volver)’,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될 그 날 (El día que me quieras)’와 ‘내 사랑 부에노스아이레스 (Mi Buenos Aires querido)’ 같은 최고의 탱고 명곡들을 함께 만들었고 연달아 히트 시킨다. 1935년에 3월는 이들의 커리어에 정점을 찍는 곡을 만들게 되는데 그 곡은 바로 ‘뽀르 우나 까베사 (Por una cabeza)’ 였다. ‘뽀르 우나 까베사’는 스페인어로 ‘머리 하나만큼의 근소한 차이’를 나타내는 표현인데 노래의 화자는 경마광으로서 경마에서 ‘머리 하나만큼의 미미한 차이’로 패배한 것과 자신의 연예사도 비슷함을 비유하며 자조하는 내용이다.
노래는 나오자마자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다. 중남미와 유럽의 클럽과 캬바레에서 사람들은 이 곡을 들었고 이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이 곡은 ‘아르헨티나 탱고’의 절정기를 만들었다. 가르델의 인기는 끝을 모르고 올라가고 있었으며 중남미의 다양한 도시들을 돌며 순회 콘서트를 하였다. 1935년 6월 24일에는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인 (오늘 날에는 마약상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통해 코카인의 이미지가 강한 곳이다.) 을 방문했는데 공연을 마친 후 가르델 일행은 비행기를 이용하여 이동 준비 중이었다. 그가 탄 ‘포드 트리모터기’가 이륙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그런데 이륙하려는 가르델의 비행기 옆에 이동 중인 타항공사 여객기가 나타났고 순식간에 두 비행기가 충돌하게 되었다. 기체는 즉시 화염에 휩싸였는데 내부의 승객들이 미처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불길이 모든 것을 덮고 있었다.
다음 날 남미를 비롯한 전세계의 가르델 팬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가르델이 비행기 화재 사고로 인해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사망자는 그의 콤비였던 작사가 알프레도 르 페라를 포함해 20여 명에 이르렀다. 가르델의 유해는 팬들의 애도를 받으며 뉴욕, 리우 데자네이루, 몬테비데오를 거쳐 마침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안장되었다.
오늘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심가를 방문해 보면 여전히 그의 노래를 연주하고 이에 맞추어 춤을 추는 많은 탱고 클럽을 볼 수 있다. 그가 사망한 지 90여 년이 지났지만 가르델의 노래는 아르헨티나인들,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에게 아직도 노래 그 이상의 의미로서 이들의 가슴에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