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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Mar 16. 2024

세 번째 노래, 비엔나의 작은 카페에서

(In einem kleinen Café in Hernals)

쉰들러와 함께 대화하는 부인 에밀리

권력을 쥔 친위대 장교들을 구워 삶은 쉰들러는 그가 원했던 식기류 군납 사업을 시작하게 되고 독일의 승리와 더불어 승승장구한다. 전쟁 특수 덕에 쉰들러의 사업은 날개를 달게 되었고 넘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한 그는 유흥과 향락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쉰들러는 수많은 여성들을 만나며 벼락부자이자 한량으로 크라코프의 밤을 지배한다. 남부러울 것 없이 인생을 즐기던 그에게 어느 날 한 독일 여인이 방문하게 된다. 그녀는 바로 쉰들러의 부인인 에밀리 쉰들러였다. 그동안 쉰들러와 별거 중이었던 그녀는 남편과 함께 다시 재결합하기를 원했다. 이들 부부는 댄스홀에서 ‘한 왈츠 곡’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에밀리는 ‘이 달콤한 음악’에 빠져서 남편을 사랑스럽게 쳐다보지만 쉰들러는 아내를 안은 체 조용히 다른 여성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아직 아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렇게 둘은 다시 떨어지게 된다.


헤르만 레오폴디 (Hermann Leopoldi)

20세기 초의 비엔나는 가히 유럽의 문화 중심지였다. 이곳은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서 지배 민족인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은 물론 우크라이나, 크로아티아, 벨로루시, 폴란드 등 광활한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 중에는 많은 수의 유대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맹위를 떨치던 비엔나의 반유대주의 분위기 속에서도 경제, 학문, 문학, 음악, 예술 등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대인들 중에 인기있는 작곡가이자 캬바레 가수였던 헤르만 레오폴디 (Hermann Leopoldi)가 있었다.  1888년에 태어난 그는 유년기부터 음악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레오폴디는 유쾌하고 다재 다능한 만능 엔터네이너였는데 1920년대에는 그의 동생과 함께 자신의 캬바레를 열면서 비엔나 시민들을 즐겁게 했다. 레오폴디는 코믹하고 유머스러운 노래와 무대 매너를 특징으로 했는데 더불어 여러 유명한 ‘비너리트(Wienerlied: 비엔나풍의 대중적인 노래)’들을 작곡한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 바로 1932년에 발표한 애상적인 왈츠 곡인 ‘비엔나의 작은 카페에서 (In einem kleinen Café in Hernals)’ 이다. 같은 유대인 작사가 ‘페터 헤르츠 (Peter Herz)’가 가사를 쓴 이 노래는 비엔나의 북동쪽에 위치한 동네인 ‘헤어날스 (Hernals)’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두 명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카페에서 틀어주는 잔잔한 유성기의 왈츠 음악 속에 두 명의 연인은 작은 모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데이트 중이다. 비록 커피 한잔의 소박한 데이트이지만 이 연인들에게 그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레오폴디는 이 짧은 순간을 즐기는 아름다운 연인의 모습을 노래로 만들었고 곡은 즉시 비엔나는 물론 전 유럽에서 히트하게 된다. 이때부터 수년 간이 ‘엔터테이너’ 레오폴디의 전성기였다. 그는 자신의 공연을 위해 베를린, 암스테르담, 파리, 부다페스트 등을 돌며 장기간의 유럽 투어를 다녔고 유럽 문화/음악계에서 확고한 위상을 구축했다. 이러한 위상의 정점으로서 1937년에는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은장공로훈장’도 받는다. 모든 것이 좋아 보였지만 곧 암울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었다.


1933년에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잡은 이후로 오스트리아에는 같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게르만 민족으로서 독일과의 합병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게 된다. 오스트리아 곳곳에는 나치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존재했고 결국 1938년 3월 13일에 나치는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합병하는 ‘안슐루스 (Anschluss: 독일어로 결합을 뜻함)’를 강행한다. 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이 진군하는 독일군을 열렬히 환영했는데 히틀러는 그 자신도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그의 고향으로 금의환향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기뻐한 것은 아니었는데 특히 나치에 의한 박해가 예상되었던 오스트리아 내 유대인들이 그러했다. 레오폴디 역시 유대인으로서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마침 안슐루스 이틀 전에 그는 가족과 함께 북쪽의 체코슬로바키아로 공연을 위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열차로 이동하던 레오폴디는 국경에 도착했는데 문제는 이미 이곳이 봉쇄되었던 것이다. 결국 열차는 다시 비엔나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미 오스트리아의 치안은 나치 친위대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비엔나에서 즉시 체포될 위기에 놓였던 레오폴디는 그의 열렬한 팬이었던 기관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레오폴디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의 출국을 위해 서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달 후인 4월 말에 레오폴디는 나치에 체포되었고 악명높은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진다.


그는 체포 직후 뮌헨 인근의 다하우 (KZ Dachau)로 보내졌는데 9월에 바이마르 인근의 부헨발트 수용소 (KZ Buchenwald)로 이송되었다. 당시는 아직 수용소에 가스실이나 화장터 등이 설치되지는 않았던 때였지만 이곳의 독일 간수들은 유대인 수용자들에게 극히 잔인하고 가학적으로 대했다. 사소한 잘못으로도 폭행이나 가혹행위가 빈번했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치는 레오폴디의 유명세와 재능을 잘 알고 있었고 그를 수용소 내에서 공연을 하게 만든다. 어느 날 수용소장이 수용소의 공식적인 노래를 공모하기 위한 컨테스트를 열게 된다. 수용소에 레오폴디가 있는 이상 이미 당선작은 결정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치에 핍박 받던 레오폴디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치가 세운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밝고 희망적인 느낌의 ‘수용소의 노래 (Buchenwaldlied)’를 작곡하였고 수용소장은 이 노래에 대단히 만족 했다. 심지어 간수 및 수감자들 조차도 이 노래를 좋아했다. 노래의 가사는 같이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 작사가 ‘프리츠 뢰너 베다 (Fritz Löhner-Beda)’가 맡았는데 ‘프란츠 레하르 (Franz Lehar)’의 오페레타 ‘미소의 나라(Das Land des Lächelns)’를 작사한 유명인사였다. 레오폴디의 노래는 수용소 사방에서 울려 퍼졌고 심지어 수용소 밖의 주민들도 노래를 알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레오폴디의 생존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는 여전히 하루하루 불안한 삶을 이어갔다.


해가 바뀌어 1939년이 되었고 이미 미국에 도착해 있던 그의 가족들은 레오폴디의 석방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의 부인은 그를 위한 미국 행 비자를 마련했고 마지막 시도로 브로커에게 상당한 금액의 뇌물을 쓴 끝에 1939년 4월에 남편을 수용소에서 석방시킬 수 있었다. 2차대전 발발 5개월 전이었다. 이후 뉴욕에 도착한 레오폴디는 가족과 감격의 재회를 하게 되고 배에서 내리며 발 딛은 미국 땅에 눈물의 키스를 한다. 이후 그는 뉴욕 내 오스트리아 및 유대계 문화인들과 교류하며 공연을 이어갔고 독일어 가사를 영어로 개사해서 부르기도 했다. ‘비엔나의 작은 카페에서’는 ‘A little Café down the street’라는 영어 곡으로 번안되어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레오폴디는 2차대전 종전 때까지 미국에 머물다가 1947년에야 다시 비엔나로 돌아간다. 당시 비엔나는 승전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에 분할 통치되고 있었는데 전후 실의에 빠진 오스트리아인들을 위해 다시 그의 음악을 들려주며 시민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나른한 오후에 커피 한잔을 옆에 놓고 이 노래를 들어보자. 모카 향기와 함께 비엔나의 고풍스러운 작은 카페에서 속삭이는 연인들의 모습이 른거릴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aNANa87rkU

In einem kleinen Café in Hernals,

Jonas Kauf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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