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변
중학생 때의 일이다. 내가 곧 쉰을 바라보니 삼십 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극장에서였다. 당시 극장은 지금과 같은 멀티플렉스가 아닌 건물 하나에 상영관이 하나뿐인 단일 개봉관이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그 시절 인기 있는 영화 한 편을 보려면 긴 줄과 새치기들의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했다. 한 겨울 언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겨운 노력 끝에 표를 손에 쥐어도 영화는 쉽사리 상영되지 않았다. 대한 늬우스와 애국가 같은 사전 의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길을 가다가도 애국가가 들려오면 걸음을 멈추어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려 국가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야 했던 그런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극장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영화 상연 전 애국가가 울리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손을 올리고 국가의 숭고함에 대한 경의를 표해야 했다. 하지만 한창 반항심이 차오르던 사춘기 청소년이었던 나는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 그 행동의 당위성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곧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저 녀석 봐. 애국가가 나오는데도 일어나지도 않네” “어머. 재 좀 봐요. 왜 일어나지 않고 저렇게 앉아 있는 거예요” 등 어른들의 지청구는 끝이 없었다. 나는 나를 타박하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나의 싸늘한 눈빛에 주눅이 들어 입을 다물고 더 이상의 핀잔은 주지 않았다. 나는 그날 끝내 국가에 대한 경의를 표하지 않고 영화를 다 본 후 극장을 나왔다
사십이 되어서야 나는 고등학생 시절 내가 문학을 꿈꾸었던 소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절 수업 시간이면 나는 선생님의 판서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열린 창밖 운동장에 이는 봄의 아지랑이를 보며 공책에다 초라한 문장을 끄적이곤 했다. 그렇게 몽상 속의 잡히지 않는 문장과 한바탕 씨름을 하고 학교를 마치면 곧장 버스를 타고 서점으로 달려가 서가의 빽빽이 꽂혀 있는 책들을 훑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때의 그런 기질 때문인지 결국 나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문예창작학과를 입학했다. 그리고 깊은 밤 원고지에 보잘것없는 문장을 썼다 지우며 변변한 작품 하나 내놓지 못한 채 이렇게 하염없는 시간만 죽이고 있음이다.
많은 문학 작가들은 서정성 짙은 주옥같은 글귀를 만들고자 매일 수많은 단어들과 고군분투한다. 나도 한때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의 목마름에 황순원이나 헤르만 헤세 같은 대 문장가들처럼 후세에 회자되는 글을 한 번 써보겠다는 늪에 빠져 숱한 날들을 보냈다. 적막한 겨울밤, 어둠 속 저 멀리 동네 개 짖는 소리가 아득해질 즈음 문득 머리를 스치는 문장들 앞에서 세상을 다 가진 듯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함 들은 아침이 밝고 이성이 눈을 뜨면 언제나 유치함으로 산산조각 났다. 시간이 가고 휴지통에 구겨진 원고지가 쌓여 갈수록 서정적인 글은 나에게 맞지 않는 옷임을 깨달았다. 나의 글은 단어나 어휘에 그 어떤 감동도 찾아볼 수 없는, 여운과 절제의 묘미 같은 아름다움과는 동떨어진 말 그대로 무미건조한 글이었다. 그것이 나의 가련한 문장이었고 문학에서는 그러한 문체를 건조체라 불렀다. 문학이 아닌 논설문과 설명문에 적합할 문체인 건조체 말이다.
내가 본문 쓰기에 앞서 이처럼 남루한 지난 일들을 들추어낸 이유는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나의 반골 기질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앞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체질직으로 제도와 규율을 싫어한다. 나는 내 안에서 발현되는 이러한 기질들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정신분석학으로 들여다보면 유년 시절 무의식에 끼치게 된 무슨 사건이 이유이었을 것임은 분명한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구체적 계기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반골 기질은 어려서부터 내 안에 존재해 있었고 그 성장은 지금도 여전하다는 것이다.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 순응하거나 따르지 아니하고 저항하는 기골”. 이는 국어사전에 명시된 “반골”이라는 단어의 정의다. 이렇게 명확한 반골의 정의는 나에게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배워왔던 모든 것들이 왜 당연한 것인지 그 당연성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물음을 던지게 했다.
세상은 늘 인간이 만들어낸 규칙과 제도들을 따르라 하는데 나는 그러한 관념들이 도무지 달갑지 않았고 그건 마치, 몸에 걸쳐진 맞지 않는 옷과 같아 나의 자아는 그러함 들을 과감히 찢어 던져버리라고 소리친 것이다.
이 책에 담긴 글들은 나의 그러한 삐딱한 반골기질이 건조한 문장과 어울려 만들어진 나만의 세상 이야기다. 이 글의 이야기들은 멀리는 십 대 중반부터 가깝게는 삼십 대 후반까지 조금씩 생각해 놓은 것들을 마흔이 넘어 구체화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왔고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관습과 제도에 대한 삐딱한 나의 시선들 말이다.
물론 나의 생각이 모두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나는 몇 년 전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적잖은 반향을 일으킨 “정의는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교수처럼 거창한 철학적 물음을 논 할 수준도 못 된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살면서 부대끼고 경험한 것들에 대한 진솔한 사유가 바탕이 된 나름의 소신은 담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를 붙이자면, 이 글에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소작농의 아들로서, 육성회비와 공납금 한 번 제때 낼 수 없었던 학생으로서 또 대기업 3차 협력업체 공돌이자 용역과 파견 근로자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부딪힌, 시대의 비주류로 살아온 자의 자격 지심과 피해의식이 담겨있다. 그런 이유로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내 생각과 의견을 달리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렇다 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나의 생각과 여러분의 생각은 서로 합치될 수 없는 바다와 하늘 같은 것이기에 답답하더라도 서로의 생각을 인정하며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아무튼 짧은 식견에 오류와 모순 투성이의 글을 읽으며 내 이야기에 공감해 주는 독자에게는 고마움을 전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책망은 굳이 받지 않겠다. 이런 태도가 작가의 무책임함이라고 질타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문제는 여러분들의 비난을 들어도 이제 내 나이가 만만치 않아 고루하게 굳어진 나의 생각들에 별다른 변화가 생길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우리 세상에는 마흔이 넘어서는 생각이 바뀌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빠르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있겠는가.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여러분들의 뜻과는 달리 내 나름의 어쭙잖은 고집을 지키며 그렇게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럼 지루한 작가의 변명은 여기서 끝내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삐딱한 문장을 시작해 보겠다. 책에서 다룰 내용은 총 백 가지로 지금부터 시작한다. 자! 그럼 함께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