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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Aug 27. 2023

비디오 키즈의 추억

몽상

어머니의 기질을 물려받은 것 같아요. 어머니가 영화를 정말 좋아 하셨거든요. 그래서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집인데도 비디오플레이어가 있었죠. 어머니가 과감하게 할부로 사버린 거예요. 물론 할부를 갚기 위해 고생은 꽤 했지만요. 아무튼 집 근처에는 비디오 대여점이 없었어요. 그래서 하루에 몇 대 없는 버스를 타고 30분이 넘는 인근 시내까지 나가서 테이프를 빌려 와야 했죠. 보통 그 일은 제가 맡았는데 전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힘들다기보다는 사실 재미가 있었지요. 비디오 대여점 유리문에 붙은 최신 영화 포스트를 보는 것도 좋았고 가게 안 삼면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형형색색의 테이프 제목을 읽으며 마음에 끌리는 영화를 찾는 재미도 쏠쏠했거든요. 영웅본색, 첩혈쌍웅, 람보, 다이하드, 그리고 코만도와 백 투더 퓨처 등 최신 비디오테이프 앞에 섰을 때의 그 흥분. 그래서 전 일부러 테이프에 새겨진 제목들을 하나하나 음미해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죠. 메이저 영화에서 벗어난 한쪽 귀퉁이 구석진 자리에 꽂힌 이름 없는 B급 영화도 괜찮았고요. 물론 최신 영화 같은 경우는 누군가 먼저 대여해 가서 항상 케이스가 비어 있을 때가 많은데 케이스를 빼내어 들어 볼 때까지는 알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테이프를 손에 들었는데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때의 그 실망감이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당장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마음이 많이 어지러웠지요. 또 때론 호기심을 이길 수 없어 일명 빨간 영화라고 불리는 19금의 야한 성인 영화 쪽으로 슬쩍 손이 가면 주인아저씨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헛기침을 하며 날카로운 시선을 뒷통수로 꽂았죠. 그럼 저는 움찔해 얼른 안 그런 척 일반 영화 쪽으로 자리를 옮겨 최근에 나온 인기영화를 를 고르는 척했고요. 하지만 시선은 계속 그쪽으로 가 있었죠. 혈기왕성한 십대 남자의 호기심을 누가 감당하겠어요. 젖소부인 바람 났네 시리즈는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볼 수. 있었지만요 하하. 아무튼 그런 비디오에 대한 피 끓는 애정 때문인지 군 생활을 하면서 인성교육 주간에 각본과 연출을 맡아 연극제에서 팀을 두 번이나 우승시켰어요. 그 모든 게 다 비디오 사랑 덕분이었지요. 요즘은 넷플릭스와 웨이브 등 거실에서 TV 리모컨 조정을 통해 간단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옛날에는 그 모든 것들이 비디오를 통해서만 가능했거든요. 지금으로 말하면 아날로그 감성이죠. 아니 감성이 아닌 갬성이라고 해야 하나 흐. 아무튼 당시 그 시대 같은 경우는 비디오 대여점이 동네마다 한 두 곳은 다 있었는데 지금 그 많은 대여점은 다들 어디로 사라졌고 그곳을 운영하시던 주인아저씨들은 모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시는지 참 궁금하네요. 이 쉰이 다 된 비디오키즈의 삶은 아직도 그 공간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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