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체 글쟁이의 삐딱한 세상-꼴통

3. 고승

by Zero

저의 종교는 무교입니다. 유년 시절 사탕을 얻어먹기 위해 교회를 찾았고 군 시절 떡과 초코파이를 얻어먹기 위해 절과 성당을 드나든 적은 있지만 그건 다 그때의 배고픔과 고통을 면하기 위한 호구지책이었을뿐 절실한 믿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엇이냐. 그것은 다시 말해 지금 저의 종교는 확실히 무교라는 것입니다.


​ 우리나라는 다종교 국가입니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 이슬람교 및 토속신앙까지 여러 종교가 얽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함에 우리나라 시민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각자의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어떤 종교든 믿을 수 있는 종교의 자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누구도 간섭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말이죠.


​ 하지만 우리나라가 비록 이렇게 다 종교 국가이기는 하나 불교가 오랫동안 우리 종교의 중추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설령 불교 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시대를 초월해 널리 알려진 스님이름 한두 명씩은 다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신라시대의 의상과 원효, 고려시대 일연, 그리고 조선시대의 무학과 사명대사와 현대의 성철 스님이나 법정 스님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 우리가 자신들의 종교와 상관없이 익히 알고 있는 이들은 모두 당대 내로라하는 고승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시절 자신들이 깨우친 학문적 삶과 종교적 철학으로 무지한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국사이자 대선사로 황실과 권세 높은 귀족 가문에 자문을 해주며 당대 정치와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 그렇다면 이번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앞서 먼저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한 번 알아봐야 되겠습니다. 우선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했습니다. 부처로 추앙받는 붓다는 인도의 한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붓다의 가르침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옵니다. 삼국시대까지 민족 신앙만이 유일했던 우리 사회는 신라 이차돈이 불교로 순교하며 종교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해 불교가 나라의 중추적인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신라에서 뿜어진 불교의 교리는 급속히 주변 국으로 퍼져 삼국은 바야흐로 불교라는 종교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고 말입니다.


​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불교는 고려시대까지 융숭한 세력을 떨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 유교에 바탕을 둔 조선이 개국하며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는 그 세력이 다소 위축됩니다. 그러나 조정의 반 불교 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악착같이 살아남아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나라의 큰 변혁 속에서도 덕망 높은 스님들이 배출되어 당대인들의 의식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 우리는 이렇게 각 시대마다 사회와 왕실에 큰 영향을 행사했던 덕망 높은 스님들을 고승이라 불렀습니다. 한 낱 필부에 지나지 않은 우리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깊은 혜안과 높은 식견을 갖춘 승려라는 뜻의 고승 말입니다.


​ 이런 고승들은 난세의 시대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나라 지키는데 앞장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말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되겠습니다. 지도층의 의무 말입니다. 또 그들은 어지러운 왕실 고문 역할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무지한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고요. 그들은 그렇게 시대마다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당대의 사회를 결속시키고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그 시절 고승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다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었던 평민과 천민들이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시대에 반해 높은 수준의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 그럼 여기서 이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돌려보겠습니다. 몇 년 전 경상북도 청도에 자리 한 작은 암자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암자에는 다도실이 마련되어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며 차를 우려 마실 수 있었습니다. 마침 나와 동행한 지인이 차에 조예가 깊은 터라 우리는 조용히 다도실에서 차를 음미하며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 찻잔이 비어 가는 사이. 출타 중이었던 주지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우리가 있는 것을 보고 합석을 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나이 많은 여느 주지들과는 달리 꽤나 젊어 보였습니다. 주름 없는 피부의 탄력으로 보아 마흔이 채 되지 않은 서른 중반쯤의 나이로 저보다도 어린 연령임이 분명했습니다.


​ 그는 차를 나누며 혹시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자기에게 물어보라 고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딱히 물어볼 게 없어 차만 홀짝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꾸 알고 싶은 게 많을 텐데 왜 물어보지 않느냐고 우리에게 물음을 재촉했습니다. 그의 재촉에는 세상이나 인생사를 내가 다 알고 있으니 옛날의 혜안 깊은 고승들처럼 명쾌한 답을 내려 주겠다는 뜻이 담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런 주지의 행동이 의아했습니다. 저보다 나이도 어리고 인생 경험도 내 것에 미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 불교의 교리에 관한 것도 아닌 세상사를 알려주겠다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와 동행은 그의 재촉에도 끝내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지는 그러한 우리를 보다 찜 맛이 없다는 듯 결국 자신의 처소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 저희가 차를 다 마시고 다도실을 나설 때 적막한 사찰은 어둠에 잠겨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방금 전 주지 모습을 되새김질해 보았습니다. 그는 왜 자꾸 저희에게 무엇을 물어보라고 이야기했을까요. 저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 번뜩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고승.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은연중에 고승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옛날 황실과 지체 높은 양반은 물론 무지한 백성들에게 지혜를 인정받으며 고승으로 불렸던 스님들처럼 자신도 세상과 삶에 대한 통찰로 당연히 고승 같아야 한다는 집착과 강박 말입니다.


​ 물론 이건 다분히 개인적인 저의 사견일 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정말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이라면 그것에는 한 가지 큰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즘 사람들의 학력 수준을 무시한 것입니다


​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고승으로 추앙받았던 옛 스님들 대부분은 당대 귀족 출신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옛날 고승들은 식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대부분이던 시대에 그들은 글을 깨우치고 학문을 배웠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 왕실과 귀족들의 고문 역할을 할 수 있었고 백성들을 교화하는 선지자로서의 우러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학 진학률과 고등교육 이수자들의 수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는 옛날 자기 이름 석자조차 쓰지 못하던 시절의 무지한 백성들이 아닙니다. 삶 또한 복잡한 세상을 현실적으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어찌 보면 자신들보다 학력도 높고 취업과 영세사업, 결혼과 육아, 부모 봉양 등 세상의 치열함도 훨씬 더 많이 겪고 있는 사람들을, 자기들이 마치 그 옛날의 고승처럼 깨우쳐 주겠다며 불교의 교리가 아닌 인생을 논하고 있으니 참으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스님이나 우리들 모두는 지금 강박에 빠져있습니다. 스님들은 옛 명망 높은 고승처럼 세상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대중들은, 스님이기에 당연히 덕망 높은 고승들처럼 뛰어난 혜안을 가지고 나보다 우월한 존재여야 한다는 강박 말입니다.

​저는 특정 종교인을 비난하고자 하는게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스님 하면 옛날 이름깨나 떨친 고승들처럼 당연히 그들은 우리와 다른 뭔가 말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사람일 것이라는 편협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서로가 옛날의 입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나 우리나 삶에 있어 한 치 앞도 모르긴 매 한 가지인 서로 똑같이 가련한 중생들 뿐이기에 말입니다.


​ 그러니 이제 스님은 종교인으로서 자신을 마음을 수양하고 경전을 깨우치기 위한 수도승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중들 역시 그들이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닌 그냥 평범한 한 인간이자 자기 수양을 다지는 구도자로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제 더는 서로가 고승이라는 강박에 얽매이지 않고 그 강박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서 말입니다.


2020. 11. 6

keyword
작가의 이전글건조체 글쟁이의 삐딱한 세상-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