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체 글쟁이의 삐딱한 세상-꼴통

12. 장군의 자리

by Zero

얼마 전 예비역 장군 한 명의 죽음으로 나라가 꽤 시끄러웠습니다. 논란의 이유는 그가 친일행적이 있는 사람이니 현충원 안장은 말도 안 된다는 주장과 또 반대로 한국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이니만큼 당연히 현충원에 안장되어야 한다는 측들의 팽팽한 대립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논란을 보며, 그가 친일행적으로 현충원 안장의 불가와 한국전쟁의 공로로 안장 가능이라는 그들의 논리에는 별 다른 토를 달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이번 일로 생각해보고자 하는 문제는 아직도 현충원에 안장되는 사람들의 그 자리 면적 기준에 대해 한 번 말해보고 싶을 뿐입니다.


​ 이번 글을 쓰기 위해 저는 우선 현충원의 연혁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습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된 동작동 현충원의 역사는 좀 복잡했습니다. 아픈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의 70여 년이라는 굴곡진 세월만큼 그 긴 나날들의 시간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그 내용을 간추려보면 대충 이렇습니다.


​ 현충원 동작동 국립묘지는 1953년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1954년 착공되었습니다. 3년에 걸쳐 묘역 238.017 제곱미터를 조성해 1968년까지 연차적으로 광장, 임야, 공원, 행정지역등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다시 1965년 국립묘지령이 제정되고 애국지사, 경찰 및 향토예비군까지 확대되면서 2005년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서 명칭도 국립현충원으로 바뀌고 지금은 소방공무원까지 안장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이렇듯 우리나라 현충원은, 국가원수, 임시정부요인, 독립유공자, 무후선열, 국가유공자, 장군, 장병, 경찰, 소방공무원 맟 향토예비군 그리고 군무원과 국무회의를 거친 순국선들이 안장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 기준은 현충원이 조성되며 순차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때, 여기에 안장되는 주요 인사들에게 주어지는 자리 면적의 기준이 각기 다릅니다. 즉 신분과 계급에 따라 누군가는 넓은 곳에 또 누군가는 좁은 곳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 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국민을 위해 자신을 버린 사람 앞에 희생의 크고 작음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똑같은 희생이고 모두가 똑같은 죽음인 것입니다. 나라를 위한 고귀한 정신은 상하를 막론하고 똑같은 것인데 어찌 죽어서 들어가는 공간에는 차별이 주어진다는 말입니까.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들의 공과 희생을 부정하자는 게 아닙니다. 누구는 장군이라서 또 누구는 사병이라서, 오직 조국과 국민이라는 하나의 이유로 희생된 그들에게 주어지는 자리의 차별이 공정한가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인 것입니다.


​ 저도 90년대 초, 중반 5년여에 가까운 군 생활을 하며 직계 동료 몇 명을 잃었습니다. 제가 근무한 부대가 특전부대이다 보니 훈련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젊은 나이에 그렇게 희생된 이유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분단된 국가에서 내 부모, 형제의 안전을 지켜주겠다는 신념. 그것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단 몇 평이라는 땅의 넓이로 마무리 지어버립니다.


​ 2019년 서울대학교 조사의 키워드는 “공정”이었습니다. 공정은 “공평하고 올바름”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내가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차별 없는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아닌지가 우리의 삶에 아주 중요한 관심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게 공정하냐 공정하지 않느냐가 중요 의제인 엄정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제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미국의 경우를 알아본 결과 그들은 지위와 신분에 상관없이 똑같은 규모의 넓이에 순국선열들이 안장된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의 방식이 무조건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만큼은 분명 우리보다 좀 더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 아무튼 저는 이번 어느 장군의 현충원 안장을 두고 벌어진 논란을 보며, 그 논란의 이유인 현충원 안장의 가, 부를 떠나, 이제 우리도 똑같은 희생 앞에 죽어서 까지 차별받아야 되는 이런 구시대적 발상은 제발 바뀌어야 할 때가 되지 않나라고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2020.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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