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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un 09. 2023

건조체 글쟁이의 삐딱한 세상-꼴통

37. 불가능에 대한 가능

-창원시 한 마을의 일이다. 마을로는 임시도로가 개통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도로로 대형트럭이 수시로 다닌다. 하지만 신호등이나 속도위반 단속 장비가 설치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트럭과의 교통사고로 사망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마을 주민들은 각 담당 부서에 민원을 계속 넣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관할 소관이 아니라거나 도로법상 임시도로에는 그 어떠한 설치물도 설치할 수 없어 민원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법이 그래서 말이다. 그런데 방송국의 취재가 이루어지자 각 부서는 신호등과 과속단속장비 설치를 검토하고 있으며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방송국에서 취재를 시작하니까 말이다. 참고로 이 임시도로 개통 년 수는 자그마치 26년이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할 때 그 일이 행정적으로 막힐 때면 그 답답함은 더욱 커집니다. 대부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담당 행정 기관과의 팽팽한 입장 차이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 힘없는 소시민의 절망감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실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뻘 속으로 빠져드는 지경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일개 시민에 불과한 개인이 행정 기관과의 분쟁에 맞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개인 대 조직의 싸움일뿐더러 복잡한 행정 절차와 규칙, 집행근거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물론 관련 법에 대한 지식 또한 미천하기에  말입니다. 그렇다 보니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시민은 결국 애꿎은 세상만 탓하며 그저 야속한 삶에 한숨만 짓게 되는 것이고요.


 


  행정기관과 분쟁에 휘말리는 시민 대부분은 소외 계층이거나 경제적 약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에 있거나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들은 지위와 돈으로 일처리를 하면 되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딱히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은 집단이나 방송의 힘을 빌리려 늘 고군분투 애쓰는 것이고 말이죠.



   KBS의 TV 방송프로그램 중에 “시청자 칼럼 우리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시청자 참여 방송으로, 개인 대 개인 또는 개인 대 기관과의 의견충돌로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관계기관들을 통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일이 해결되지 않아 마지막 방법으로 방송의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방송에 출연하는 이들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수 십 년 동안 다툼에 휘말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 같이 구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고 방송에 나오기 전까지 자신에게 닥친 일을 해결하고자 온몸의 에너지를 쏟아부은, 권투로 말하자면 탈진 직전을 그로기 상태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때까지 해결되지 않던 일들이 이 방송에 한 번 나오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일들이 일사천로 해결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의 행정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방송의 힘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때는 법리와 규정, 규칙을 들어 그토록 해결되지 않던 것들이 방송에 한 번 나왔다는 이유로 그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해결되어 버리니 말입니다.



  규정과 원칙에 의해서 해결되지 않던 일들이 단지 방송에 나왔다는 이유로 해결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럼 방송에 나오기 이전까지 해결되지 않았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다는 말입니까. 이는 애초에 될 수 있던 일을 의도적으로 해결 해주지 않았다는 말밖에 무슨 다른 해석이 필요하겠습니까.



  본인의 개인사가 전 국민에게 노출되는대도 불구하고  방송에까지 나와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상황이 절박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절박한 상황을 관계기관에서는 규정과 원칙을 들어 민원인들이 만족할  결과를 안겨 주지 못했던 것이고요. 그런데 그런 일관된 원칙들이 방송 앞에 허물어진다면 그게 과연 말이 되는 소리일까요.



  세상에는 변치 않는 진리가 있지만 변화하는 법칙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규정과 원칙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세상이다 보니 개인보다는 다수, 즉 공공의 이익을 위해 그런 규정과 원칙이 존재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기관에서는 개인에게 일정 부분 불이익이 따르더라도 공익을 우선해 규정과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했을 것이고요.



  그런데 그 불가능했던 일들이 단지 방송에 나왔다는 이유로 가능해진다면 이는 분명 일을 처리해 주는 사람들의 이전 행동에 잘못이 있었다는 반증 밖에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개인에게 규정과 원칙으로 그 오랜 시간 해결해 줄 수 없었던 일들이었다면 비록 방송에 나왔다 하더라도 법이 바뀌지 않은 이상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아야 옳을 것이니 말입니다.


2021.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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