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립준비청년이다.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처음 듣는 생소한 단어일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로 설명하자면 초등 3학년, 보육원에 들어가 만 18세까지 한 시설에서 생활했다. 연장이 가능한 경우도 있긴 하다만 거의 모든 아이들은 만 18세까지만 생활이 가능하다. 즉, 아동양육시설 및 위탁가정의 보호를 받다 만 18세에 퇴소하는 청년을 뜻하는 말이다. 만 18세 이후엔 나라에서 나오는 자립정착금을 가지고서 퇴소를 해야 한다. 내 나이엔 자립정착금은 300만 원이었고, 그 돈은 나의 전재산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생활했던 보육원은 작은 사회라고 해야 할까. 작은 군대라고 해야 할까. 최적의 단어가 떠오르진 않지만 의미는 전달되었을 것 같다. 그곳은 공동체로 시작해 공동체로 끝나는 곳이다. 나의 청소년기 인생을 그곳에 바쳐야 한다. 그곳은 폭력이 당연하며, 약자에게 강한 어른, 아이가 아이 같지 않단 이유로 꺼려하는 어른, 부모가 존재한단 이유로 차별이 당연한 어른, 믿음보단 미움으로 둘러싼 다양한 어른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과 나와 다른 것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보육원에서 생활한다는 것뿐, 선생들과 똑같은 시간 속에 살고 그들이 겪었던 성장을 나 또한 겪는 것일 뿐인데 그들은 그 자리가 특별한 위치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옳지 않은 행동에 죄의식 없이 그것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를 알면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그곳이 막다른 골목처럼 느껴졌을까, 벼랑 위에 서있는 절벽이라고 생각했을까. 어느 쪽이든 힘없는 아이들은 그 상황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것을 굳이 깨닫지 않아도 머릿속에 각인되어있었을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까.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를 주는 이유는 결국 우리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들의 편견과 그리고 본인의 잣대로 스스로 면책부를 만들어 자신의 행동의 정당화를 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부모가 존재한다. 1년에 한두 번 만날 수 있었다. 부모와 싸워본 기억이 있지 않아도, 떼를 써본 기억이 있지 않아도, 가족의 따듯함을, 울타리를,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어도 나는 부모가 존재한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부모가 존재한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나도 없었으면 부러워했을 것이고, 불안했을 것이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 크고 작은 차별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견뎠다.
나는 부모가 있으니까. 저 아이들을 더 예뻐해 주는 게 맞아. 나는 부모가 있으니까. 후원자를 안 붙여주는 게 당연해. 나는 부모가 있으니까. 차별이 당연하고, 미움이 당연하고, 내가 힘들어도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선 안 돼. 나는 부모가 있으니까. 나에겐 부모가 있으니까.
이 얼마나 웃기는 건방짐인가.
너는 불합리를 강요하는 어른들에게 마음을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기라도 했어야지. 그들에게 사랑받으려 너 자신을 놓치지 말았어야지. 이상한 현실 속에서 너는 너를 잊지 말아야지. 나보다 더 힘든 아이가 있을 거란 안일한 생각으로 현실에 감사하지 말았어야지. 너도 어른의 울타리를 경험하며 너 자신을 지켰어야지. 이 모든 걸 참고 견디며 네 안은 무너지고 있었다는 걸 너는 알았어야지.
난 내가 가진 건방짐으로 눈치를 배웠기에 철이 또래 아이보다 일찍 들었다.
그러나 나 또한 따듯한 곁이 필요했고, 나도 그들처럼 챙김을 받고 사랑이 고팠던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