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불행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뉴질랜드에서는 유난히도 행운이 많이 따랐다. 항공사에서는 무료로 좌석을 업그레이드해주었고, 현지에서는 새로 산 휴대폰 유심카드에 문제가 있다며 비용을 받지 않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행운이었다. 그중 이란 가족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뉴질랜드 생활을 함께해 준 소중한 인연이다.
은행 계좌를 개설하러 가는 길이었다. 숙소 근처인 오클랜드 시티에 한국인 직원이 근무하는 은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복잡한 업무를 현지인이 근무하는 은행에서 영어로 신청하고 싶었다. 일단 퀸 스트리트에 갔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길을 물었다.
“퀸 스트리트가 어디예요?”
퀸 스트리트에서 퀸 스트리트가 어디냐고 물은 나. 현지인이라면 누가 봐도 여행자임을 알 수 있는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친절한 할아버지는 -영어를 잘하시진 않지만- 어디를 가느냐고 묻고 내가 은행을 찾는다고 하자 친히 은행까지 에스코트를 해주셨다. 이전에 케밥 가게 주인이 나를 본 지 이틀 만에 동거 제안을 했던 터라 경계심이 생기긴 했다. 그래도 길에서 뭔 일이 날까 싶기도 했고, 할아버지의 친절을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바쁘시지 않느냐고 돌려 물어보기도 했지만, 아내가 고향인 이란에 가 있어서 괜찮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지갑에서 아내 사진까지 보여주시는데 설마 나를 첩으로 둘 생각까지는 아니겠지.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아드님이 한국에서 일을 했다며 더욱 반가워하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할아버지는 머지않아 나의 이란 대디가 되어주셨다. 어떻게? 그 얘기는 잠시 미뤄두겠다.
은행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오랜 대기 끝에 겨우 직원에게 문의 정도는 할 기회가 왔다. 중동 출신 같아 보이는 그녀의 영어는 손색이 없었으나 나의 청력은 문제가 많았다. 같이 온 이란 대디도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겨우 이해한 내용은 다른 지점으로 가라는 이야기뿐.
하는 수없이 다른 지점을 찾아 나섰으나 문을 닫아서 다음을 기약했다. 이후 유심 카드를 구입하기 위해 휴대폰 매장으로 이동했다. 여기도 입구에서부터 대기표를 받고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이란 대디도 그 기다림을 함께 하셨다. 한참 뒤 직원의 안내로 창구에서 유심을 구매하고, 새 휴대폰 번호도 얻었다. 요금제를 고르던 찰나, 아! 이란 대디를 깜빡했다.
여전히 대기표를 발급하는 곳에 다소곳이 앉아 계시는 이란 대디. 우리 친아빠도 이렇게까지는 나를 못 기다리실 텐데. 어느새 저녁시간이 되어갔다. 이란 대디는 먼저 가보셔야 한다기에 꾸깃꾸깃한 종이에 개통한 전화번호를 알려드렸다.
휴대폰 충전까지 마치고 휴대폰 매장을 나왔다.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새 정이 들었나? 전화 올 사람이라곤 이란 대디뿐인데 내가 번호를 제대로 알려드렸나? 전화번호가 적힌 번호는 잘 보관하셨으려나? 괜한 걱정이 든다. 그러고 보니 퀸 스트리트 근처에 사신다고 했는데 여기 어딘가에 사시는 걸까? 전화번호를 알려드렸으니 궁금하시면 연락 주시겠지 싶다가도 연락처 적어드린 종이를 잃어버리면 어쩌지 싶기까지 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란 대디는 왠지 나에게 도움을 주면 줬지 해를 입힐 분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시 만나고 싶어졌다.
시티 근처에 산다면서 포트 스트리트Fort street 근처의 높은 빌딩을 가리켰던 게 생각났다. 내가 그 가족과 인연을 맺으려고 그랬는지 굳이 지친 몸을 이끌고 주변의 높은 빌딩을 찾아 서성거리고 있었다. 급기야 고급 레지던스로 보이는 빌딩의 리셉션에 가서 이 빌딩에 이란인 가족이 살고 있는지를 물어보고 있다. 당연히 경비원은 그 정도 정보로는 입주민을 알 수도 없고 알려줄 수도 없다고 했다. 스토커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숙소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오! 심지! 어디 가는 길이야?”
맙소사. 운명인 걸까?! 포트 스트리트를 따라 숙소로 가는 길에서 다시 이란 대디를 마주한 것이다. 알고 보니 이란 대디의 아파트는 내가 그날 옮긴 호스텔과 같은 길에 있었고, 그 중간에 위치한 중국 마트에 저녁 장을 보고 돌아오시던 길이였다. 마침 내가 레지던스까지 들리며 시간을 버느라 타이밍까지 맞았던 것. 반가운 마음에 이란 대디는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하신다. 집에 따님도 와있고, 나의 행운이 어디까지 향해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란 대디의 딸 엘나즈는 대학원생으로 한국에 관심이 많아서 우리는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가 낯설었는데, 이란 가족과는 누구 하나 서먹하지 않았다. 다섯 식구가 모여서 밤 11시까지 수다를 떨기도 했다.
물론 모르는 사람의 집을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선의인지 사기인지를 알 수 없는 그 확률 게임에서 나는 운 좋게 너무나도 호의로운 뉴질랜드의 새로운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동할 때마다 짐이 되었던 나의 가방들도 기꺼이 맡아주었다. 이란 가족은 내게 짐을 덜어주고 힘을 실어주는 존재였다. 무거웠던 내 마음도 이들과 함께라면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
퀸 스트리트를 걷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런 좋은 인연을 만난 행운은 새롭게 시작하는 내 뉴질랜드 생활에서의 삶과 마지막 이십 대의 생활을 응원해 주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