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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심지 Apr 09. 2024

방을  찾습니다

플랫 면접?

 내가 꿈꿨던 뉴질랜드에서의 그림은 이랬다. 같이 사는 –한국인이 아닌-외국인 플랫메이트Flatmate와 가끔 식사도 같이 하고, 한국에서 겪었던 일들을 치유하기 위해 평안한 내 방에서 글을 쓰며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사생활이라고는 도무지 허락하지 않는 이 호스텔을 하루빨리 벗어나서 나만의 방이 있는 플랫을 구해야 한다.   

 플랫은 주로 방은 각자 쓰되 주방이나 화장실 등을 같이 쓰는 공동 주거 형태의 집을 의미한다. 방값이 비싼 시티에서는 방도 같이 쓰며, 심지어는 모르는 사람과 침대까지 같이 썼다는 얘기도 들었다. 처음에는 방을 구한다는 게 돈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원하는 형태의 방, 위치, 그리고 이상적인 플랫메이트까지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나 오클랜드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니까 공급은 문제가 없을 거라고 착각했다. 그런데 플랫 입주, 그러니까 플랫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 취업만큼이나 어려울 줄이야.      

 인터넷만 접속할 수 있으면 트레이드 미Trade me에 들어가서 플랫 광고를 뒤졌다. 트레이드 미는 부동산부터 직업, 물품 구매에 이르기까지 생활 전반에 필요한 모든 공급과 수요가 흐르는 커뮤니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부합하는 플랫메이트 광고 글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오늘은 나에게 맞는 방이 있겠지' 하는 기대로 매일 트레이드 미를 들락거렸지만 턱없이 부족한 새 글. 그랬다. 오클랜드에는 공급만큼이나 수요도 넘쳐났다. 이력서를 뿌리듯 가능한 많은 곳에 문자를 보내놓았지만, 모두가 답장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밤에 문자를 보냈다고 혼나기만 한 곳도 있다. 그러니까 서류 심사, 아니 문자 심사에서부터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도 매일 플랫 광고를 뒤적이며 '내일은 내 일이 있겠지'하는 취업 준비생의 희망처럼 간절하게 플랫을 찾아 헤맸다.      

 

 오클랜드에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았지만, 딱히 어디로 떠나야 할지도 몰라서 우선 시티 주변을 알아봤다. 그러나 요구 사항이 충족될수록 예산은 점점 더 내 기대와 멀어져 갔다. 아무리 그래도 싱글 룸과 무제한 와이파이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오클랜드 시티로 검색 조건을 설정하면 한 주에 방세만 200불(한화로 약 16만 원)을 훌쩍 넘긴다. 

 참고로 주당 방세는 빌Bill을 포함하는지를 꼭 확인해봐야 한다. 렌트비는 고정되어 있지만, 빌은 구성원의 씀씀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월말에 인원수대로 나눠서 별도로 내는 것이다. 추가로 납부하는 항목에는 전기세, 가스비, 인터넷, TV, 심지어는 화장실 휴지와 세제까지도 포함된다. 대부분의 한국인 플랫은 방세에 빌을 포함했다. 반면 외국인 플랫(내 입장에서 외국인은 뉴질랜드인이나 서양인)의 경우는 빌을 제외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방을 계약하기 전에는 반드시 보증금(Deposit)이 얼마인지, 집값은 몇 주치를 미리 내야 하는지, 집을 나갈 때 몇 주 전에 알려줘야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 즉 노티스Notice도 알아야 한다. 

 한국인 플랫은 코리아 포스트와 다음 카페(뉴질랜드 이야기)에서도 정보를 구할 수 있다. 한국인들만 있으니 의사소통도 쉽고, 전기밥솥에 쌀까지 제공하니 외국인 플랫보다는 상대적으로 편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당시에 한국말도 듣기 싫을 만큼 한국인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가능하면 외국인 플랫을 원했다. 덕분에 고생을 왕창 살 수 있었지만.      


 유학생이나 현지인들이 내놓은 플랫 광고는 어딘가 까탈스러운 면이 많았다. 아마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그전에 겪었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였겠지. 그들의 요구조건은 대부분 이랬다. 커플 사절! 담배 피우는 사람 사절! 애완동물 사절! 기존 플랫메이트들과 비슷한 연령대. 6개월 이상 장기 거주할 사람만. 하루 종일 일하는 사람 환영. 

 여기서 내 발목을 잡는 요인은 한 지역에 오랫동안 머물 계획이 없었으며, 풀타임은커녕 파트타임 잡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래도 부딪혀보기로 했다. 정말 좋은 플랫이라면, 일도 구해서 자리를 잡고 더 오래 머물지도 모르는 거니까. 오늘은 떠돌이 백수지만, 내일은 어떻게 변해있을지 누가 장담하겠는가.      


 일단 예산을 늘릴 수 없다면 거주 지역의 범위를 더 넓혀야 했다. 오클랜드 시티를 기준으로 도보 한 시간 이내의 거리쯤으로 검색 조건을 완화할수록 방 크기도 훨씬 커졌다. 집 인테리어도 내가 그리던 정원과 고급 빌라의 느낌을 갖춘 고풍스러운 곳도 눈에 띄었다. 때로는 그 고풍스러움이 정도를 넘어 고대 유적지처럼 변해버린 곳도 있었지만, 시티의 닭장 같은 아파트보다는 좀 더 여유가 있는 현지의 느낌을 품고 있었다. 

 그중 오클랜드 대학교의 그라프톤Grafton 캠퍼스 근처에 있던 집은 1층 집들이 일렬로 줄지어 있던 동네였다. 늦은 밤에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플랫메이트는 굉장히 살갑게 맞아줬다. 마치 친구 집에 놀러 온 듯 차를 마시며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가구가 없는(Unfurnitured) 방이라 아쉽게 포기해야 했다. 최종면접까지 가고도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조건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어렵게 찾아간 그레이 린Grey Lynn 지역의 플랫은 공사 중인 원룸텔처럼 작고 어수선해서 꽤 실망스러웠다. 집주인이 차로 시티까지 태워줘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호스텔로 돌아왔다. 나의 목표는 플랫 헌팅(Flat-hunting 방을 구하러 다니는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니 나름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니 이 또한 시간 낭비라기보다 홀로서기의 경력 치를 쌓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호스텔을 하루씩 버겁게 연장하면서 플랫 헌팅을 한 지 약 일주일이 지났다. 이쯤 되니 또 시간에 쫓기던 버릇이 나온다. 그렇게도 피하려던 한국인들과 식사도 같이 할 만큼 호스텔 생활도 적응이 되었지만, 그들과는 분명히 선을 긋고 싶었다. 대부분의 워홀러가 그러하듯이 그들은 농장과 공장에서 돈을 많이 벌어 여행을 한다는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래의 여행보다 오늘의 일상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여기까지 와서 일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그 일상의 평안함을 위해 또 악착같이 플랫 헌팅을 하고 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지 않으려면, 목적지로 가는 그 여정도 즐겨야 한다. 그래서 나는 플랫 헌팅을 갈 때마다 시간의 여유를 두고 출발했다. 도착지까지 걸어가며 근처의 학교도 구경하고, 잠깐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기도 했다. 그러니 플랫 헌팅은 산책이면서 운동이고, 또 여행이었다.      

 이번에 도착한 집은 조금은 낡았지만 꽃과 나무가 조화롭게 둘러싸인 아담한 빌라형 플랫이었다. 트집을 좀 잡자면 방 밖의 잔디밭과 나무가 있어 곤충이 들어올까 겁이 나기도 했다. 방값에 비해 시티와 먼 것도 흠이었다. 그러나 호스텔을 당장 탈출해 줄 구세주라는 생각에 플랫을 소개하는 플랫메이트에게 ‘나이스, 러블리’를 연발했다. 

 친절했던 그는 나를 거실에 앉히고부터 느낌이 좀 싸해졌다. 이전에 언퍼니처드 룸이었던 플랫처럼 플랫메이트는 총 3명이 될 예정이고, 한 명이 나간 자리를 메꾸기 위해 광고를 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동등한 플랫메이트의 느낌이 아니었다. 그는 선한 인상을 유지하면서도 면접관의 자세로 질문을 던졌다. 

 “뉴질랜드에 온 지 얼마나 됐어? 일은 해? 안 하면 돈은 어디서 나서 집세를 낼 거야?”

 일을 아직 못 구한 것은 면접관이 왜 취업 공백기가 기냐고 업무 자질을 묻는 것만 같았다. 돈이 어디서 나서 집세를 낼 거냐는 질문은 입국심사에서 불법체류를 의심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방세를 제때 낼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당연한 질문이었겠지만, 나로서는 다소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건 나인 걸 어쩌랴. 성실한 세입자로서 어필하기 위해 돈은 충분히 있으며, 곧 일도 구할 것이라고 앞으로의 다짐을 드러냈다. 

 결과는? 그는 다른 사람과도 약속을 잡아놨으니 플랫메이트와 상의해 보고 24시간 이내 연락을 준다며 나를 –밀어내듯- 배웅해 줬다. 최종면접을 보는 마음으로 마지막까지도 나를 어필하기 위해, 나는 언제든 들어올 수 있다며 언제쯤 연락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답변은 여전히 24시간 이내. 합격자에게만 연락을 준다는 얘기를 안 해서 나는 24시간 내내 그의 연락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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