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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심지 Apr 11. 2024

힘내보다
인내

기다리는 자에게 방이 있나니

 결국 -플랫 면접관과도 같던- 그에게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보다 더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지원자(!)가 플랫 면접(!!)에 합격을 한 모양이다. 젠장. 한국에서도 무수히 많은 면접에서 떨어져 봤지만, 이젠 하다 하다 플랫 면접에서까지 떨어지다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또다시 트레이드 미에 발을 내딛는 일뿐이었다. '제발 나를 데려가주오.'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플랫 광고를 찾아보는데, 범상치 않은 글이 포착됐다.     


     Asian girl

     4 months only 

     Mt Eden 

     NZD 160 (incl. bill)     


 아시안 걸이면? 한국인인 나! 4개월만 살길 원한다라? 오클랜드에서 적당히 유유자적하다가 이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예정이라 단기 거주를 희망하는 나! Mt Eden이면 시티까지 도보로 20분 정도? 그 정도 거리는 충분히 걸을 수 있는 나! 관리비 포함해서 160불이면, 예산인 200불보다도 적으니까, 아싸! 나! 이거 완전 나를 위한 플랫인데?     


 선착순 달리기라도 하듯이 재빨리 연락을 하려는데, 핸드폰 번호 대신 메일 주소밖에 없다. 어쩌면 단문 문자보다 좀 더 길게 나를 어필할 수 있는 기회일지 모른다. 광고 글에서 필요로 했던 모든 요건을 갖췄음을 어필하는 내용과 연락처를 담아 메일을 보냈다. 한시라도 빨리 답장을 받고 싶은 내 맘이 통했는지 곧 문자로 답장이 왔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내일 저녁 마야(?)와 함께 호스텔로 데리러 오겠단다. 

 흠. 불현듯 찝찝한 마음이 든다. 플랫 광고 글은 대부분 답장이 오면 주소만 알려줘서 직접 찾아가는 편이었다. 게다가 플랫메이트 중에는 갑(甲)의 입장으로 세입자를 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친히 호스텔까지 데리러 와주시겠다고? 그것도 저녁에? 

 그러고 보니 아시안 걸만 찾는다는 것도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글을 올린 사람은 여자일까? 같이 온다는 ‘마야’는 대체 뭐지? 사람인가? 아니면 영어 대명사 같은 건가? 설마 차에 탄 순간 나를 데리고 마운트 이든(Mount Eden)이 아닌 진짜 천국으로 보내버리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상상은 이쯤에서 접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High risk, high reward. 위험이 클수록 보상도 큰 고위험 고수익 투자, 이 광고는 나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하지만 놓치기엔 너무 완벽한 플랫이라 집이라도 구경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 플랫요정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며칠 전, 도서관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지나가던 영국인 남자에게 길을 물어봤는데 방향이 같아서 같이 도서관까지 걸어갔다. 요리사로 일을 하고 있는 그는 시티에 플랫을 구해 살고 있다고 했다. 내가 플랫을 구하고 있다고 하며,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할 수 있도록 연락처를 교환한 걸 정말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이야.

 "나 지난번에 도서관 앞에서 만났던 심지인데, 혹시 내일 플랫 구하러 가는 데 같이 가줄 수 있니?"

 "물론이지. 일 끝나고 너희 호스텔로 갈게. “

 그를 플랫 요정으로 고용하고 나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플랫을 구할 때, 꼭 체크해야 할 계약 사항을 봐줄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픽업 차량을 탈 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스텔로 데리러 오기로 했던 시간이 됐다. 호스텔 앞으로 나가보니 선한 인상에 키가 큰 남자가 봉고차 앞에 서 있다. 나를 보자 손을 내밀며 인사부터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크리스예요.”

 차 안에는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금발의 여자 아이가 수줍게 앉아 있었다. 아, 저 꼬마 숙녀가 그의 딸, 마야구나! 

 그런데 플랫 요정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플랫 면접에서 약속 점수를 까일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그러나 배려 깊은 크리스는 아예 플랫 요정이 있는 곳으로 픽업을 가자고 한다. 와우, 이렇게까지 친절하다니!     


 플랫 요정까지 합류한 차는 시티에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의 지하 주차장에 멈췄다. 주차장 안도, 밖도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내겐 플랫 요정이 있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크리스가 안내한 곳은 한국에서도 볼 법한 빌라식 아파트의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집 안에서도 신발을 신고 다니던 다른 플랫과 달리, 크리스는 먼저 현관문 앞에 신발을 벗고 우리를 안내했다.

 왼쪽 복도의 화장실을 지나면 방 두 개가 있는데 그중 첫 번째 방문을 열었다.   

  

(위 사진은 내가 입주하고 난 후의 사진이라 책상이 지저분하다;;)

세상에. 내가 찾던 안락함 그 자체다! 진심으로 사랑스러운 방이었다. 큰 창문 너머로는 산이 보이고, 한쪽 벽면에는 피아노도 놓여 있었다. 이층 침대 위에는 아기자기한 이불이 구김살 없이 덮어져 있었다. 침대 위에 장식해 놓은 곰돌이 인형은 마치 절대로 이 집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크리스가 방문 옆에 가려져 있던 옷장 문을 열자 내 마음도 활짝 열리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 집이야!     

  여기에 끝나지 않고 크리스는 수건이 놓인 창고부터 욕조가 딸린 욕실까지 소개를 이어 나갔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거실 한쪽에는 세탁 건조대에 빨래가 널려 있었고, 오픈식 주방도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집은 어린아이를 가진 3~4인 가족이 살기에 딱 적합해 보이는 사이즈였다. 

 집을 다 둘러보고 이제 면접을 볼 차례인가 싶어 긴장이 되려는 찰나, 크리스는 집이 마음에 드는지부터 물어본다. 암요~ 나는 적극적으로 집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문제는 크리스가 앞으로 몇 명이나 더 만나볼 예정이며, 그중 누구를 고르느냐인데... 

 이게 웬걸. 나한테만 연락을 한 상태이고, 원하면 내일이라고 당장 입주가 가능하단다. 

 다 좋은데, 왜 세를 놓게 된 걸까? 회사도 연봉이 높으면 일이 많아서 문제고, 일이 편하면 비전이 없어서 문제인 것처럼 완벽한 것이란 없는 법인데. 크리스의 집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거지?      


 사정은 이랬다. 크리스 부부는 폴란드 출생인데, 최근 부인이 둘째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 겸 부모님을 뵈러 폴란드에 몇 개월 정도 머물 계획이었다. 그래서 큰 방을 딸 마야와 함께 쓰고, 남은 방을 세놓게 되었다. 이전에도 플랫메이트를 들여 본 적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아시안들이 집을 깨끗하게 썼다고 한다. 거기다 딸 마야를 고려해서 아시안 걸을 선호 한다고 광고했던 것이다. 아마도 퇴근 후에 방을 보여줘야 하는데 해가 지면 어두워서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직접 픽업까지 온 것 같다. 그런 선량한 사람을 잠시나마 오해하고 플랫 요정까지 대동한 것이 머쓱해졌다.      


 “호스텔 체크아웃이 몇 시예요?”

 “11시예요.”

 “그럼 이 열쇠 가지고 가서 내일 먼저 들어와 있어요.”

 심지어 다음 날 호스텔 체크아웃 후 짐을 들고 갈 곳이 없을 나를 배려해서 열쇠부터 건네는 것이 아닌가. 계약서는커녕 아직 방세도 내지 않았는데 말이다. 처음 본 나와 같이 플랫을 보러 와준 영국 친구가 플랫 요정이라면, 이런 따뜻한 환대를 해준 크리스는 플랫 천사다. 그동안 플랫을 찾아 동서남북으로 밤낮을 헤매고 다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이날은 플랫메이트에게 잘 보이려고 –면접용 포트폴리오처럼 신뢰를 주기 위해- 내 앨범까지 들고 왔다. 그러나 크리스는 앞으로 일은 할 건지, 방세는 어떻게 낼 건지 따위의 질문으로 신원을 확인하지 않았다. 

 “맥주랑 음료 중에 뭐 마실래?”

 대신 내게 음료를 건넸고, 그것은 드디어 플랫을 구한 승리의 축배와도 같았다. 어느새 플랫 요정과 크리스는 맥주를 마시며 축구 얘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 둘의 대화를 끊고 싶지 않아 나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가져온 앨범을 정리했다.       


 플랫을 구하는 게 스트레스였던 건 하루빨리 내 방을 갖고 싶다는 성급함에서 비롯됐다. 플랫메이트가 면접관처럼 보였던 이유도 그 성급함이 나를 절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취업처럼 말이다. 하지만 취업이든 플랫이든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인연이라는 게 나만 부추긴다고 되는 게 아닌데, 가끔씩 착각을 한다. 내가 열심히 하면 되는 거라고. 인연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운명에 맡길 필요도 있다. 목표한 것이 빨리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적절한 운명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 그것이야말로 노오력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이십 대의 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내 자신을 마인드 컨트롤할 때 스스로에게 힘내라고 응원하는 것에만 익숙했다. 그러나 때로는 힘내라는 말로 노력을 더 부추기는 것보다 인내하는 나를 토닥여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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