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끗발이 개 끗발?
뉴질랜드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호의적인 걸까? 아니면 내가 운이 좋았던 걸까?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가 흔하지 않던 시절인데도 길을 물어보면 휴대폰의 구글 지도를 켜서 자세한 방향을 알려주고, 심지어는 집 근처에 세워 둔 차의 시동을 다시 켜서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기도 했다.
대학 교수이자 작가인 윌리암을 알게 된 것도 길에서 시작되었다. 평소 강아지를 좋아하는 나는 은행 앞에 늠름하게 서있는 윌리암의 반려견 재키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마침 전날, 캐나다에서 살다 온 지인이 말하길, 몇몇 외국에서는 애완동물을 키우려면 나라에 등록을 해야 하고, 매일 의무적으로 산책도 해야 돼서 이를 대신해 주는 아르바이트도 있단다. 즉, 애완동물을 기르려면 등록비며 매일 산책을 할 여유가 필요하므로 애완견은 부의 상징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 정보 덕분에 자연스럽게 윌리암과도 뉴질랜드의 반려견 보호법에 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뉴질랜드 역시 등록된 반려견은 매일 산책을 시켜줘야 한다기에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반려견의 산책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하면 내게 말하라고 했다.
“이전 회사 이름이 너의 반려견 이름과 같은 걸 보니 얘가 내 보스가 되려나 봐.”
우스갯소리를 던졌더니 흔쾌히 내 번호를 물어왔다. 곧 윌리암의 친구가 은행 업무를 보고 있던 돌아와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이후 시티를 좀 더 배회하고 있던 차에 그에게 다시 문자가 왔다.
"재키가 너를 필요로 해!"
윌리암을 다시 만난 곳은 그의 집 근처인 마이어스 공원Myers park이었다. 그가 가리키는 집은 외관만 봐도 꽤나 비싸 보였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조심스럽게 그의 직업을 물어봤다. 그는 현재 페인터이자 작가라고 답했다. 롸이터는 알아들었는데 페인터는 뭐지? 페인트를 칠하는 건설업 종사자인가 싶어 아리송해하다가 다시 한번 물어봤다. 아! 그림을 그리는 페인터란다. 어쩐지 백발 머리와 스타일리시한 복장이 예사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것이 반가워서 나도 작가가 되는 것이 내 꿈 중에 하나다, 출판을 하기에는 아직 연륜이 부족한 것 같아서 블로그에 일기만 쓰고 있는데 방문자수가 적지는 않다고 은근슬쩍 자랑을 했다. 그러자 윌리암은 본인이 곧 출판할 책의 온라인 홍보를 도와주는 게 어떤지 제안을 해왔다. 아무래도 내가 어리니까 SNS 같은 건 본인보다 빨리 배우지 않겠냐는 것. 좋은 경험일 거 같아서 그런 일은 돈 안 받고도 기꺼이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가벼운 인사로 시작된 인연이 이렇게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줄 줄이야.
게다가 집에 오는 길에 YMCA 호스텔이 있길래 일자리를 찾으러 무작정 들어가 봤는데 매니저가 마침 한국인이었다. 어느새 정식 면접 날짜까지 잡았다. 겨우 면접 기회를 얻은 것뿐이지만 대기업 서류심사라도 통과된 듯 기뻤다.
좋은 건 맘껏 감사하기로 한 나는 아까 말한 지인한테 오늘 완전 럭키 데이라고 살짝 자랑을 했다. 그러자 그 운이 언제까지 가는지 궁금하다며 ‘첫 끗발이 개끗발’같은 소리나 한다. 이 말은 초반에 패가 잘 나와서 이기던 게임도 후반에는 돈을 다 잃게 된다는 말인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지?
이후로도 나는 윌리암의 집에 초대를 받아 내 생에 최고의 스테이크도 맛보고, 차가 없이는 이동할 수 없는 해변가에도 함께 다녀왔다. 뉴질랜드 여정이 끝날 때쯤엔 기스본Gisborne에 있는 윌리암의 독채에도 일주일간 혼자 머물 수 있게 해줘서 물질적으로도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여행이란 게 사람 하나만 잘 만나도 행운 아닌가.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게임이든 투자든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행운을 의미한다. 아마도 초심자는 자신도, 다른 이도 별 기대가 없다는데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잘해야 한다.’라는 심리적인 압박이 없어서 기존의 고수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추측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뉴질랜드에서 만난 행운들은 대부분 기대하지 않은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애초부터 내가 윌리암의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다가간 것이 아니라 더 자연스럽게 대화가 가능했고, 서로에 대한 경계도 덜할 수 있었다. 내가 뉴질랜드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무조건 이곳에서 365일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이 없었기 때문이다. 힘들면 언제든 떠나도 된다, 굳이 잘 살지 않아도 된다, 한국에서처럼 열심히 살 필요가 없다며 스스로를 옭아매지도 않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뉴질랜드에 스며들게 되었다.
그럼 뉴질랜드에서부터 갑자기 행운을 볼 수 있게 된 이유는 뭘까? 오클랜드 공항에서부터 내 시력이 좋아진 것도 아니고, 뉴질랜드가 내 체질도 아닐 텐데 말이다. 내 결론은 이렇다. 한국에서든 어디에서든 가벼운 마음으로 주위를 넓게 보고, 주변에 널린 기회를 주워 담을 용기만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행운아가 될 자격은 갖춘 셈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주어진 것에 감사함을 아는 사람이 행복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초심자의 행운? 첫 끗발이 개 끗발? 행운은 어디에서든 그 행복을 찾아내는 자의 몫이고, 그게 바로 내 끗발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