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게 한 이십 대의 아픔
쨍그랑.
평소답지 않게 괜히 기분을 내겠다고 와인 잔을 꺼낸 것이 화근이었다. 하나 남은 와인 잔을 꺼내다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깨진 와인 잔의 큰 유리 조각은 손으로 치우고, 카펫에 흩어졌을 파편은 청소기로 최대한 빨아들였다.
문제는 이걸 같이 사는 플랫메이트, 크리스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컵이나 그릇 같은 주방용품은 주인인 크리스가 쓰던 것을 써도 된다고 했지만, 이렇게 파손을 했을 경우는 내가 어떻게 보상을 해줘야 할지가 난감하다. 그냥 아무 와인 잔이나 사다 놓으면 되려나? 혹시 특정 브랜드이거나 아끼던 거면 똑같은 걸 사다 줘야 하나? 일단 크리스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안해요. 내가 와인 잔을 깨뜨려 버렸어요. 내일까지 새로운 것으로 사다 놓을게요. 정말 미안해요.”
“걱정하지 마. 그건 마지막 남은 한 개였고, 그 세트는 이미 다 깨졌어. 게다가 가격도 싼 거야. 새로운 세트를 살 수 있는 좋은 기회지.”
크리스는 천사가 분명하다! 어쩜 저렇게 긍정적일 수가 있지?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항상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나라면 새 와인 잔을 사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앞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크리스의 생각은 달랐다. 하나 남은 와인 잔마저 잃은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와인 잔 세트를 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며 유쾌하게 답해주는 마음. 미안해하는 나를 안심시켜 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고, 경이롭기까지 했다. 위기는 기회이고, 때로는 상실마저도 더 나은 기회의 구실을 만들어내는 전환점이 된다는 것. 크리스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는 주로 주방의 식탁에서 노트북을 하곤 하는데, 매일 아내와 화상채팅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모니터 속의 그녀가 아주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눈물의 화상 채팅은 며칠째 계속됐다. 남의 사생활을 차마 물어볼 수도 없어 대신 걱정만 해주고 있었는데, 크리스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아내가 시민권을 준비 중인데 해외 체류 기간을 잘못 알고 있어서 시민권 취득이 미뤄질 것 같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상황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크리스 식구들은 폴란드 이민자 출신이었다. 크리스는 먼저 자리를 잡아 뉴질랜드 시민권자였지만 아직 영주권자였던 크리스의 아내가 시민권자로 전환되려면 지난 5년간 뉴질랜드에 최소 1,350일 이상을 체류하고, 매년 4개월 이상을 뉴질랜드에 계속 거주해야 했다. 당시 둘째를 출산한 그녀는 아이와 함께 부모님이 계시는 폴란드에 갔는데, 해외 체류 기간을 잘못 계산해서 시민권 취득이 어려워진 것이다. 나중에서야 변호사를 통해 이 소식을 알고 그녀는 급히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항공편을 알아봐야 했다. 오랜 시간 시민권 취득을 준비했고, 가족들과 축하 파티도 계획했던 터라 그녀의 실망은 눈물로 이어졌다.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와 달리 크리스는 이번에도 역시 침착함을 유지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어차피 기회는 또 있으니까. 이미 자기가 시민권자이니 가족이 함께 뉴질랜드에 사는 데는 문제가 없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시민권 획득을 위해 들인 시간과 정성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클 텐데 여전히 그는 현재의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후회하는 것은 현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가진 것을 누릴 수 있는 시간만 갉아먹을 뿐이다. 가끔 나는 흘러간 내 이십 대를 돌이켜보곤 한다. 그땐 왜 그렇게 일에만 연연했나 싶어 자책이 들 때도 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여기까지 흘러오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
한때는 패션업계에서 경력을 살려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고 대학교 강단에도 서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부당 해고를 당하고 회사와 싸우느라 경력은 절단 나며 그 꿈도 깨져버렸지만. 그만큼 한국에서의 일들이 너무 힘들었기에 내가 꿈을 포기하고 뉴질랜드를 올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만약 회사가 내쫓지 않았다면 나는 힘든 데도 멈추지 못하고 계속 오기를 부리며 살았을지 모른다. 당시에 나는 일을 통해 출세하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 남은 와인 잔처럼 내가 바라는 꿈은 일을 열심히 해서 경력을 쌓는 것, 그 한 잔의 축배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던져진 ‘해고’라는 큰 상실감은 내 세계관을 깨트렸다. 신에게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왜 내 남은 하나의 꿈마저 깨트렸냐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끈 전환점이 된 셈이다. 크리스의 말대로 나는 오래된 와인 잔 하나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아예 새로운 와인 잔을 세트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내 기회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도 있다고 마음을 넓게 먹으니 새로운 땅, 뉴질랜드에 올 용기가 생긴 것이다.
나처럼 미련이 많은 사람은 스스로는 결코 마지막 잔을 버리고 새로운 잔을 사지 못했으리라. 회사가 그렇게 못되게 굴지 않았으면 난 뉴질랜드를 오지 못했을 것이다. 혼자서는 깨닫지 못했으니 그렇게 아프게 깨졌나 보다. 내 이십 대의 아픔이 결국 나를 새롭게 살게 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