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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심지 Apr 18. 2024

일은 하고 싶지만
돈은 벌기 싫어

뉴질랜드에서 자원봉사활동하기

한국에서의 나는 경력을 쌓아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일을 했다. 그것은 동시에 돈을 버는 일이었고, 그 돈을 주는 환경은 냉혹했다. 그래서 뉴질랜드에서는 내 마음이 나아질 때까지 돈을 버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돈을 벌려다 약값이 더 든다는 말처럼 나는 부당 해고로 인한 우울증에 서른병까지 걸린 환자다. 애써 평온한 이곳까지 왔는데 내 시간을 고용주에게 돈으로 저당 잡혀 더 힘든 일을 당할까 두려웠다. 

  적어도 만 서른 살이 되는 생일까지의 내 시간은 내가 샀으니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오전 11시쯤 느지막하게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만들어 먹고 오후 한 두시쯤 되면 산책을 나갔다. 저녁쯤 들어와 때로는 플랫메이트인 크리스와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하고, 늦은 밤까지 인터넷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내가 기대했던 완벽한 그림이지만 한 가지 빠진 게 있다면 글을 쓰는 것. 한국과 뉴질랜드에서 겪었던 일들을 책으로 내고 싶어 노트북도 항시 대기 중이며 필기구도 잔뜩 싸왔는데 갈수록 그 일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래, 억지로 시키지 말고 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주자. 그렇게 한없이 관대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백수노릇도 하루 이틀이지 점점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호스텔에서 만난 다른 워홀러들은 농장이나 공장, 아니면 식당 등을 찾아 일을 구하러 다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돈 버는 일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돈은 곧 시간인데, 나에게는 마지막 남은 이십 대를 즐길 시간도 빠듯했기 때문이다. 돈은 버는 일은 시간이며 경력이며 요구하는 것이 많았다. 그럼 돈을 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재밌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래, 그거지!      


 뉴질랜드의 맑은 날씨가 아깝지 않게 이날도 워킹 홀리데이Walking holiday를 즐겼다. 자주 가던 시티 방향과는 등을 지고 반대 길로 걷다 보니 마운트 이든 빌리지Mt Eden Village라는 곳에 다다랐다. 이곳은 작지만 나름의 분위기를 갖춘 레스토랑과 카페 등이 도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여유로운 모습을 감상하며 거리를 배회하던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50c each. 하나에 50센트? 문 앞에 미끼상품인 로스 리더Loss leader가 ‘날 좀 데려가쇼’ 하고 나를 가게로 유인한다. 그 유혹을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별로 쓸 일도 없는- 줄자 하나를 집어 들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중고물품을 파는 그곳은 각 지역에 지점을 둔 머시 호스피스 숍Mercy Hospice shop이었다. 이 숍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가게’처럼 기부받은 물건을 저렴하게 파는 비영리단체이다. 의류는 물론 책, 전자제품, 작은 가구나 예술 작품 등 다양한 물건을 판매한다. 심지어는 속옷까지도 파는 만물상이 따로 없다. 여기라면 내가 찾는 그것이 있지 않을까? 흠. 가게 운영시간에 관한 소개글밖에 없군.     

 가게를 나와 한 블록 정도를 더 걷다 보니 이번에는 레드 크로스 숍Red Cross Shop이 보인다. 이곳 역시 중고 물품을 파는 세컨드 핸드 숍으로 오클랜드에만 열 개가 넘는 지점을 가지고 있다.  


 “혹시 여기 자원봉사자를 구하고 있나요?”

 “연락처 남겨주시면 매니저한테 전달해 드릴게요.”

 그렇다. 내가 원하던 그것, 돈을 받지 않고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자원봉사였다. 상업적인 일을 위해 고용된 일꾼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자원해서 하는 일인 만큼 적어도 노동을 강요받는 느낌은 받지 않을 것 같았다. 특히나 자원봉사는 돈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니니 함부로 사람을 대하거나 갑질을 하는 고용주는 없지 않을까?

 그렇다고 누구든 자원봉사자로 받아주는 것은 아니었다. 지점에 따라 정해진 인원이 있으니 봉사자를 구하는 시기가 따로 있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 내가 찾아간 마운트 이든 지점은 나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곧 기회가 찾아왔다.      

 

  오클랜드 대학에서 주최한 한식 교육을 받으러 가는 첫날이었다. 케이로드K-road를 지나가는 길에 익숙한 간판을 발견했다. 레드 크로스 숍이었다. 역시 걷다 보면 내 길이 나오는구나. 가게 앞 입간판에 적힌 문구는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나를 반기고 있었다. 

  ‘Volunteers appreciated.’

 자원봉사자 환영! 저 말이죠? 하하. 지체할 필요 없이 냉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여기 자원봉사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몇 시부터 가능하세요?”

 “오후 5시 이후부터는 매일 가능해요.”

 “그럼 이따 오시면 돼요.”

 정말 나 여기서 일할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오후에 오면 다시 인터뷰를 보는 건가? 아무리 자원봉사라지만 이렇게 쉽게 합격을 하다니. 얼떨떨한 기분으로 가게를 나왔다. 


 다시 오후에 가게를 왔을 때, 나는 어느새 행거에 걸린 셔츠와 바지 등을 사이즈 순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매니저가 와서 마감 때 정산하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말 그대로 일사천리로 일이 돌아갔다. 나중에는 계산은 물론 옷이나 소품을 매칭해서 진열하는 VMD 업무까지 하고 싶은 일을 뭐든 자발적으로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패션 회사의 사무직으로 일을 했다. 나의 업무는 해외 공급처에 발주를 넣는 것부터 시작해서 국내 세관을 통과한 제품을 매장에 입고시키는 전 과정을 컴퓨터로 처리하는 일이었다. 또 전국의 매장에서 보내온 매출과 재고 현황을 취합해서 팀원들과 임원진에게 보고해야 했다. 가끔 매장을 나가는 일도 있었으나 거의 사무실에서만 일을 하다 보니 엑셀에 집계된 숫자로 주로 현장을 파악하곤 했다. 

 그런데 말도 잘 안 통하는 뉴질랜드에서는 오히려 나를 모니터 밖으로 끌어내었다. 그 매출 숫자를 만드는 고객을 직접 응대하고, 사진으로만 보던 제품을 진열하며 보고서에 인쇄된 총 판매 금액을 손으로 세서 마감 짓는 일까지 맡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그저 내가 할 줄 아는 컴퓨터 업무만 해왔고 이 외의 길은 걸어볼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잘 들었는데, 나는 다른 제안을 하고 싶어요. 매장에서 딱 2년만 근무할 생각 없어요? 정말 잘할 거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굳이 포트폴리오가 필요 없는 면접 자리에서 제품을 팔 듯 내 소개를 하던 나였다. 그래서였는지 사무실에서 매장을 관리하는 직군으로 지원을 했는데 직접 매장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내 꿈이 확고했기 때문에 내가 지원한 직군 이외의 일은 재고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뉴질랜드에서의 나는 돈도 안 받고 그때 제안받았던 매장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정규직으로 일하는 그때의 명품 매장 일과 자원봉사로 일하는 세컨 핸드숍의 일이 강도는 확연히 다르다. 중요한 건 뉴질랜드에서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을 두지 않고 새로운 것을 자꾸 도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컨 핸드숍 자원봉사 이전에도 오클랜드 전역을 돌며 나뭇가지를 손질하는 자연보호 자원봉사를 했고, 대학교에서 진행하는 임상실험 자원봉사도 했다. 친구를 사귄다거나 영어를 배울 목적도 아니었다. 그냥 소일거리가 필요했다. 대신 돈을 받고 일하는 것에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었다. 한국에서 그렇게 회사에서 당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일을 하며 다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나를 아껴주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봉사활동을 통해 조금씩 일을 하고 동료들과 얘기도 나누다 보니 업무 시간이 너무 길지 않은 파트타임 정도라면, 고용주가 너무 악덕하지만 않다면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게다가 나는 레드 크로스숍에서 손님을 응대한 경험도 있어 현지 서비스업 일을 구할 때도 가산점이 될 수 있었다. 

 ‘그래, 이번에도 내 틀을 깨 보는 거야. 돈을 버는 일도 못 할 건 없지. 한번 부딪혀보자.’

 그렇게 나는 내 트라우마를 조금씩 깨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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