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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심지 Apr 19. 2024

감기에
 빨리 낫는 법

뉴질랜드에서 감기에 걸리면?

 저녁이 되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약간의 비염과 축농증이 있는 나는 감기 몸살에 걸리면 온몸이 쑤시는 것은 물론 얼굴 전체가 콧물로 가득 차서 터져버릴 듯 두통이 심한 데 해외라 병원을 가기도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미리 여행자 보험을 들고 와서 다행이다. 보험사에 내 증세와 함께 휴대폰 번호를 써서 메일을 보내자 곧 전화가 왔다. 뉴질랜드는 가정 주치의(GP) 제도로 운영되어 길면 예약이 일주일도 걸릴 수 있다는데 다행히 다음 날 방문 가능한 병원을 안내받았다.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윌리암이 집까지 데리러 와줬다. 덕분에 병원까지 헤매지 않고 갈 수 있었다. 보험사에서 서류 접수를 잘못해서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신경이 날카로워졌지만 의사 선생님이 밝은 얼굴로 나를 맞아주신 덕분에 차분히 증세를 말씀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영어가 잔뜩 적힌 종이 한 장만 건네주며 딱히 약은 없고 푹 쉬라는 처방을 내려주신다. 약이 필요 없다니... 나는 비염 증세가 있어서 약은 꼭 받아야 한다고 강력히 어필해서 비염약만 겨우 처방전을 받았다.   


  집에 오니 내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는 소식을 들은 크리스가 팬케이크와 레몬차를 내 방에 전달해주었다. 약은 먹지 않았지만 윌리암과 크리스의 따뜻한 배려로 어느 정도 몸이 괜찮아진 듯했다. 

그래도 완치를 위해 의사 선생님이 약 대신 주시려고 했던 그 무적의 동의보감 같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았다. 신체 그림과 영어가 빼곡히 적혀있는 걸 보니 일단 영어 사전이 필수인 듯싶다. 의학용어가 많을 듯싶어 필기구도 꺼내 밑줄도 박박 긋고 열공모드로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데... 결론이 이게 맞아?

“따뜻한 차를 먹고 쉬어라.”

 그 길고 긴 문장과 복잡한 의학용어의 종착점은 ‘쉬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뉴질랜드는 감기로 병원에 가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한다. 자연치유를 중요시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약을 남용하지 않고 웬만한 병은 휴식만 한 처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어른뿐 아니라 어린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감기는 충분한 휴식과 자기 면역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조금만 아파도 약을 안 먹고 병원에 가지 않으면 미련하다, 돈 아끼다 병을 더 키운다고 핀잔을 주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딱히 어느 방식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흔히 걸리는 감기는 몸이 쉬라고 신호를 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십 대의 나는 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쉬는 만큼 뒤처지는 느낌이었다. 설령 아픈 순간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특히나 졸업 후 취업 공백기가 1년이나 되고, 이직도 잦았던 나는 남들보다 뒤처진 직장 생활에 조급증이 있었다. 빨리 경력을 쌓아서 진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이십 대에만 할 수 있는 것을 놓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 마음의 감기가 찾아온 것이다. 우울증. 내 몸은 습관적으로 면접을 보고, 회사를 가고를 반복했다. 그러나 나는 힘들고 지쳤고, 내 마음은 아팠던 거다. 그걸 외면한 결과, 나는 상냥하지 못한 뾰족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고 퇴출 1순위가 된 것이다.      


 영양제를 먹듯 자기 계발서를 신봉하고 업계의 전문가를 롤모델로 삼아왔었다. 문제가 생겨도 휴식을 갖고 나 스스로의 면역 시스템인 자존감을 가동하기보다 다른 이의 생각이 우선시 되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 다른 사람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그렇게 타인이 지어준 약에만 의존한 셈이다. 그러다 보니 내 면역력이 약해졌고 자기 확신이 부족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떠한 흔들림과 비난에도 나 스스로의 자존감이 살아 있었다면, 그리고 잠시 멈출 줄 아는 여유가 있었다면 이십 대의 감기는 오히려 금세 회복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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