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빛(7)

by 지수

란은 한참 울음을 쏟아낸 다음 해음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해음은 란이 밤바람에 떨지 않도록 이불을 폭 덮어 주었다. 란의 조그만 몸만은 부디 춥지 않길 바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란은 깊은 잠에 빠졌다. 한동안 꾸지 않았던 진과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붉은 악몽이었다.



“그래서 지금, 아버지랑 바다에 있다고?”

진의 아버지가 다녀가고 일곱 번째 해가 저물 무렵. 느티나무가 란에게 다급히 소식을 전해주었다. 진의 아버지가 다시 진을 찾아와 강제로 끌고 가려하였고, 진은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고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였다. 란은 진의 소식을 들으러 학교로 뛰어오던 순간부터, 기분 나쁜 예감 속에 잠겨있었다. 분명 오늘 진에게 큰일이 일어날 것이다. 어쩌면 그 일은 진의 목숨마저 앗아갈지 모른다.

란은 해란초가 있는 바다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갔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쉬지 않고 끝없이 나아갔다. 이윽고, 벅찬 숨을 내쉬며 진이 있는 바다에 도착하였다. 첫 만남 때처럼 연하늘색 셔츠를 입은 진이 아버지와 거리를 유지한 채 올곧이 서 있었다. 그리고 석양빛에 반사되어 붉게 타오르는 바다를 황량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진-!”

란이 크게 소리 내어 진의 이름을 불렀다. 진은 란이 서 있는 곳으로 곧장 가닿았다.

“못 보고 가는 줄 알았어.”

진이 란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란은 공허한 눈빛으로 잡은 손을 가만히 응시하였다.

“…가야 하는 거지?”

란의 물음에 진은 차마 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미안해…미안해, 란아…….”

“…다신 내려오지 마.”

란이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삼켜내며 단호히 말했다.

“난 반드시 돌아올 거야.”

“거짓말……. 너 다 잊어버릴 거잖아. 올라가면 나 같은 거 생각도 안 할 거잖아.”

이내 란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진은 울고 있는 란을 단단히 껴안았다.

“함께할 거라 했잖아. 꼭 다시 찾아올게. 그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야 해, 알았지?”

란은 결국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런 란의 모습에 진 역시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다.

“이만 올라가자.”

진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아버지의 뒤편에서 총구를 든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버지-!”

진이 돌연히 아버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총성이 울려 퍼지고 총알이 진의 오른쪽 손목을 빗겨 지나갔다. 손목의 피가 사방으로 튀며 모래언덕에 핀 해란초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진은 예상치 못한 고통에 신음을 뱉어냈다. 오른쪽 손목에선 계속해 피가 솟구쳤다.

진의 아버지는 서둘러 소지하고 있던 총기를 꺼내 저격수를 향해 겨눴다. 저격수는 당황한 기색 없이 의연한 자세로 진의 아버지를 향해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의 정적을 이어, 두 번째 총알은 목표물의 심장을 정확히 뚫고 지나갔다. 목표물은 중심을 잃고 엎어진 다음 모래사장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끝내 두 눈을 감지 못한 채 자신의 마지막을 맞이했다.

이후, 저격수는 재빨리 자신의 정체를 감췄다. 총소리를 듣고 뒤늦게 도착한 일본 순사들이 피에 젖은 현장을 목격하곤 허둥지둥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던 진의 세계가 일순간 멎었다. 그러나 진의 오른 손목에서는 여전히 노을빛을 닮은 붉은 피가 쉼 없이 흘러내렸다. 진의 연하늘색 와이셔츠는 이미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진은 급격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대로 모랫바닥 위에 쓰러졌다.

“이진…! 진아…!”

란은 황급히 진의 곁으로 다가가 치맛자락을 찢었다. 그리고 피로 물든 진의 오른 손목을 감쌌다.

“란아…….”

“아무 말하지 마.”

란의 까맣고 투명한 두 눈에 크나큰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끝까지 함께해주고 싶었는데…정말 미안해……. 그때 말한 내 소원…너와 같이 꼭 이루고 싶었는데…….”

진이 창백한 얼굴로 겨우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 말하지 말라니까-!”

란이 울먹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진은 힘없이 떨리는 왼손을 들어 란의 눈물을 천천히 닦아주었다.

“란아…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그땐…어린 소년의 모습이었으면 좋겠어. 이번 생에 너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 짧아서…다음 생에선 오랜 시간을 너로 가득 채우고 싶어. 그럼…란이 너의 얼굴에 주름이 잡힌 모습까지 볼 수 있겠지…?”

진이 핏기 없는 하얀 입술을 올려 애써 미소 지어 보였다. 란은 안절부절못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란아……. 다 잊어버려도 좋으니까…내가 없는 시간도, 너의 색을 잃지 말고 지금처럼 너답게 살아가 줘……. 그리고 먼 훗날…빛을 되찾은 이곳에서, 앳된 모습으로 우리 다시 꼭 만나자……. 그때, 내가 널 꼭 기억할게……. 사랑해, 정말 사랑해 란아…….”

재회를 향한 애틋한 소망과 마지막 고백을 끝으로 진은 란의 곁에서 고요히 두 눈을 감았다. 란은 진의 피로 얼룩진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싸늘해진 진의 몸을 최대한 가까이 껴안으며 울부짖었다.

이후, 진과 진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경성에 전해졌고, 진의 어머니는 스스로 집에 불을 질러 화염 속에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란은 홀로 빛을 되찾은 마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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