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빛(6)

by 지수

완전히 해가 지고 나서야 란은 산속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란은 쉬이 대문을 열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서있었다. 문을 열면 펼쳐질 광경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란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넌 날 기다리고 있을까? 날 기억하고 있을까?

‘끼이익-’

란이 긴 숨을 내뱉으며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진을 포함한 모두가 부엌과 마루를 오가며 때늦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린 모습의 진은 어느새 자신을 생각하며 모아두었던 옷을 꺼내 입고 있었다.

연하늘색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소년……. 란이 홀로 수백 번, 수천 번 그려왔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마주한 그 모습은 예상과 달리 너무 생경하게 다가왔다.

“어, 왔어? 같이 저녁 먹자.”

가장 먼저 란을 발견한 해음이 어서 오라는 손짓을 지어 보였다. 우진은 그릇을 나르며 란을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묘한 기분과 감당하기 힘든 벅찬 감정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현재의 자신이 아닌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서 존재했을 또 다른 자신을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우진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애써 외면하였다. 그리고 란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 외면에 란의 마음은 한 번 더 무심히 가라앉았다.

“야, 여자 사람. 왜 아직 저 아이가 여기 있는 거야?”

란이 우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란아, 그러지 말고 같이…”

“누가 데려오래? 누가 여기 있게 하래? 감히 네까짓 게 뭔데 이러냐고-!”

란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늘을 찢듯 솟구친 목소리였다.

“박란.”

초록이 낮은 목소리로 란을 타일렀다.

“이러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기뻐서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알았어? 쟨 아무것도 몰라. 쟨 그냥…다시 태어난 다른 사람일 뿐이야.”

문득 서러움이 한없이 북받쳐 올랐다. 앞으로의 시간도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던 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건 자신이 여태껏 기다리고, 찾아 헤매던 만남이 아니었다.

‘다시 널 만나게 되면 분명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나와 함께한 모든 기억을 잃고, 날 전혀 떠올리지 못하는 넌, 단지 같은 얼굴을 한 낯선 사람일 뿐이야…….’

란은 상상과 다른 현실 앞에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내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의 모습과 어울리는 어린아이처럼.

해음이 잠시 주저하다, 서둘러 란이 혼자 서 있는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해음은 오랜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무너진 란을 따뜻이 안아주었다. 깊어지는 가을 달이 두 사람을 위로하듯 은은한 노란빛을 쏟아냈다.



울고 있는 란과 달래 주는 해음을 잠시 뒤로 한 채, 초록은 우진을 데려다주고 있었다. 우진은 걸어가는 내내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기야?”

초록의 물음에 정신을 다잡은 우진이, 낡고 페인트가 벗겨진 허름한 주택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대문 옆 우편함에는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우편물이 다발로 마구 꽂혀 있었다.

“우진아.”

초록이 천천히 무릎을 굽혀 우진과 눈높이에 맞췄다. 이어 우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많이 놀랐지?”

“…….”

“그 여자아이는 괜찮을 거야.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강한 아이거든.”

우진이 초록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와. 알았지?”

우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호의는 일시적이며, 만남은 지속될 것 같지 않았다. 우진에게 있어 기대는 또 다른 상처를 불러올 뿐이었다.

“우진아. 솔직히 난 네가 그동안 어떤 상처를 받아왔는지 잘 몰라. 그런데 앞으론 너 스스로 조금씩 선택하고 결정하는 연습을 해봤으면 좋겠어.

이전엔 네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던져지는 상처를 온전히 다 받아낼 수밖에 없었을 거야. 하지만 이제부턴 그 상처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걷어낼지 너의 힘으로 정해봤으면 해.”

우진은 초록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어떠한 말을 전하고 싶은지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앞으로 상처받는 일들과 또다시 마주한다 해도, 자신의 선택과 결정으로 상처가 상처로 남지 않도록 천천히 바꿔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서 들어가.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우진은 고개 숙여 초록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작은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초록은 현관에 불이 켜지는 것을 확인한 뒤, 집 주변의 나무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혹시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 꼭 알려줘. 내가 아끼는 친구가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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