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빛(5)

by 지수

“여긴 왜 오셨어요.”

사람들이 모두 학교를 떠난 뒤에야, 진은 중년의 순사에게 말을 꺼냈다. 중년의 순사는 자신의 부하들을 뒤로 물린 뒤 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진은 그 모습을 차갑고 경멸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저도 잡아가시려고요? 형 체포하실 때처럼요?”

“말 가려해라.”

“그렇게 해보세요. 어머니께선 이제 정말로 목숨을 끊으시겠네요.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시진 않지만 말이에요.”

‘착-!’

뺨을 치는 소리가 허공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진의 고개가 돌아가고, 란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붉게 번져 가는 진의 뺨을 보며 란의 가슴 한쪽이 저릿하게 조여왔다.

“지금 총독부에서 너희들 움직임을 주의 깊게 감시하고 있어.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그래서요? 그냥 아버지처럼 살라고요? 나라 빼앗은 놈들에게 빌붙어서요?”

“이진-!”

“정말이지-!…역겹습니다. 어떻게 저놈들 편에 서실 수 있으세요? 어떻게…자식을 버리실 수 있으세요?”

“그랬기 때문에 우리 집안을 지킬 수 있었다.”

“참 아버지다운 변명이네요.”

진이 얼굴에 조소를 띠며 중년의 순사를 노려보았다.

“이진. 좋은 말로 할 때 돌아와라.”

“아버지!”

“이번 주까지 정리해서 올라와. 그때까지 경성으로 오지 않으면…”

“…….”

“똑똑한 놈이니 무슨 뜻이지 알아들었겠지. 판단 잘해라. ”

중년의 순사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학교를 떠났다. 진은 초점 없는 눈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덩그러니 그곳에 서 있었다.

“이진.”

란이 느티나무 옆에서 진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박란씨.”

란의 얼굴을 마주한 진이 금세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감정을 감추려는 듯, 어색한 웃음이었다.

“괜찮아?”

“…다 봤구나.”

“아버지가 왜…”

란이 조심스레 이야길 꺼내려 하자, 진이 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바다 보러 갈래?”



다음날, 란과 우진은 함께 바다로 향했다. 초록빛 바다와 모래언덕 그리고 해란초. 둘은 그 속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잔잔히 일렁이는 파도를 응시했다.

“란아.”

진이 먼저 둘 사이의 말문을 열었다.

“까분다. 너 왜 어제부터 반말이야? 나보다 몇백 살은 어린놈이.”

“…응?”

“됐어. 어차피 넌 아무것도 모르니까…….”

란이 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모래알을 만지작거렸다.

“저기 핀 해란초, 예쁘지?”

진의 말에 란이 모래 땅에서 해란초로 눈길을 돌렸다.

“어. 예쁘네…….”

둘은 함께 한여름의 태양 아래서 은은히 빛나고 있는 해란초를 바라보았다.

“우리 형은 꽃과 관련된 서적을 어릴 때부터 모았었어.”

문득 란은 어젯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언급되었던 ‘형’을 떠올렸다.

“그 서적 중에 여름꽃을 담은 책이 있었는데, 해란초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 특별해 보였거든. 본질은 꽃이지만 겉의 생김새는 난을 닮고, 흙이 아닌 바닷모래에서 꽃을 피워내는 특성이 말이야.

보통의 꽃들과 다른 자기만의 고유한 색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 같았어. 그래서 좋았어. 난 늘 아버지로부터 획일적인 삶을 강요받아 왔거든. ‘너도 저렇게 해야 한다.’, ‘절대 뒤처져선 안 된다.’, ‘남들 눈에 튀는 짓은 하지 마라.’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미칠 듯이 숨이 막혀왔어. 다른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없는 나라의 현실이 너무나 생생히 와닿았어.

그래서 여기까지 내려오게 된 거야. 계몽된 사회에선, 그리고 마침내 독립된 나라에선 온전히 나로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그 무렵, 란이 너와 마주치게 되었어. 마치 넌…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았어. 아무 거리낌 없이, 그저 자신만의 속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지. 난 내 대부분의 삶을 그저 순응하며 수동적으로 살아왔는데……. 그래서 결국 아버지로부터, 일제로부터 형을 구하지 못했어. 비겁하게…….

이런 나와는 다른 널 마음 깊이 동경하게 됐어. 널 보면 숨 쉬는 듯한 느낌이 들어. 란이 네가, 죽음과도 같던 내 삶을 구해준 거야.”

진은 기나긴 고백을 끝마치며 란의 손을 부여잡았다. 진의 내면을 마주한 란은 함께 맞잡은 손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한 진의 마음이 생각보다 더 깊고 넓어서 숨을 쉴 수 없었다. 란은 서서히 작은 숨을 내뱉은 다음 손을 떼어 두 팔 가득 진을 껴안았다.

“나도 그래, 이진.”

란의 짧지만 확실한 고백에 진은 미소 지으며 란을 더욱 세게 껴안았다.

“란아, 내 꿈은 말이야…해방된 조국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거야. 어떤 구속도 없는 한적한 산속에서…….

언젠가 우리나라가 빛을 되찾는 날이 오면…그때, 나와 평생을 함께해 줄래?”

란은 진의 말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인간은 자신과 영원을 함께할 수 없다.

“왜 대답이 없어?”

진이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란은 초조히 입술을 달싹이다 나지막이 진의 이름을 불렀다.

“이진.”

“응?”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똑같이 사랑해 줄 수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진이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란은 그런 진을 진지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이윽고 진 또한 웃음기를 거두고 란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흔들리는 란의 눈빛을 똑바로 응시하며 따뜻이 란의 뺨을 어루만졌다.

“란아. 네가 어떤 존재이든,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내가 널 많이,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불안해하지 마. 앞으로의 시간도 너와 함께 할게.”

이전 20화[초록의 계절] 빛(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