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이랑 저 남자아이가, 연인 사이였다고?”
초록의 방에 앉아 란과 우진의 과거를 전해 들은 해음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생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전생에서의 인연이 또다시 서로를 이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익숙하면서도 놀랍게 느껴졌다.
초록은 복잡한 얼굴의 해음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야. 수십 년 동안 잃어버렸던 인연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일이니까.”
해음은 문득 모래언덕 위의 해란초를 떠올렸다. 그리고 곧 해란초를 응시하던 란의 이질적인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그로 인한 상실감과 그리움을 백 년 가까이 안고 살아야 했던 란의 마음은 어느새 돌처럼 굳어버렸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긁힌 마음이 상처와 회복을 반복하며 두껍고 단단한 흉터를 품었을 것이다.
불현듯 해음의 시선이 초록의 방에 있던 옷장으로 향했다.
“초록아. 옷의 주인이 저 아이인 거지?”
초록은 해음의 물음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움의 행위가 쌓여 만들어낸 흔적들이 계속해 남자아이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 그만 꺼내 달라고. 마침내 마주하게 된 자신의 주인과 어서 빨리 만나고 싶다고.
해음은 방문을 열어 미래와 놀고 있던 우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인 뒤 다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우진에게 말했다.
“우진아. 옷 갈아입자.”
“네?”
“그 옷, 갈아입자고.”
우진은 자신의 낡고 해진 옷을 쳐다보다 천천히 일어선 다음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방으로 들어섰다.
“다 네 옷이야.”
해음이 옷장 문을 열어 우진에게 보여주었다.
“제 옷이라고요?”
“응. 다 네 거야.”
우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해음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나간 여자아이. 그 아이가 네게 주는 선물이야. 다시 만나게 되면 꼭 고맙다고 말해야 해. 알았지?”
“…네.”
우진은 자신을 향해 놓인 선물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옷들을 찬찬히 어루만지다 연하늘색 셔츠 앞에서 손길을 멈췄다.
“그 옷은 아직 네가 입기엔 클 것 같은데.”
초록이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그냥…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우진이 연하늘색 셔츠에 계속 시선을 둔 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때, 해음의 두 눈에 우진의 오른쪽 손목에 남겨진 흉터 자국이 들어왔다. 해음은 잠시 호흡을 고르고 숨을 들이켰다. 눈앞의 흉터가 해음을 조용히 짓눌렀다.
“…손목의 상처, 어떻게 생긴 건지 물어봐도 돼?”
해음이 흉터에서 시선을 거둔 뒤 우진의 눈을 쳐다보았다. 우진은 해음의 물음에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뗀 뒤 시르죽은 얼굴로 답했다.
“2학년 때 다쳤어요…라면 끓이려다가…….”
우진의 목소리엔 나이에 맞지 않는 슬픔과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2학년이 혼자? 어머니는?”
“주무시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약은 발라주셨어?”
“…….”
또다시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우진의 상처가 만들어 낸 이번 침묵은 꽤 오래 무겁게 이어졌다. 그 침묵은 손목에 새겨진 흉터의 무게보다, 받아야 했지만 받지 못했던 관심과 책임의 무게에 치중돼 자리 잡았다.
순간 방안으로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서서히 해가 지고, 란의 집이 어둑이 잠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