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절대 나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란은 진보다 먼저 해송 보통학교 앞에 도착해 있었다.
“오기만 해 봐. 감히 산신을 기다리게 해?”
란이 투덜대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을 때, 멀리서 자신을 향해 뛰어오고 있는 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이걸 구해오느라…….”
진이 숨차하며 노란빛으로 다소곳이 물든 꽃을 란에게 건넸다. 화를 내려던 란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꽃을 받아 들었다.
“그 꽃 이름은 해란초입니다. 바닷가 모래땅에서 자라는 꽃인데, 난초와 같이 아름답다고 해서 해란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해요. 어제 박란 씨를 보고 생각이 난 꽃인데, 마침 이 근처 바다에서 볼 수 있다 해서 급히 다녀왔어요. 첫 선물로 주고 싶어서.”
진은 해란초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이처럼 해맑게 미소 지었다. 란은 그런 진의 모습을 응시하다 손에 든 해란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수한 연노랑의 잎들과 중간에 자리 잡은 영롱한 주황빛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홀로 수백 년의 시간을 지나온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아하고 고운 꽃이었다.
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서 아리따운 꽃을 떠올려준 진을 바라보았다. 진은 티 없이 말간 얼굴로 란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결국, 떠나갈 거야…이 꽃을 떠올리고, 이 꽃을 준 걸 후회하면서…….’
“네가 바보같이 계속 기다릴까 봐 나왔어. 이제 더 이상 마주칠 일 없을 거야. 마지막 꽃은, 잘 받을게.”
“박란 씨.”
“소망하는 일, 잘 되길 바라.”
“가지 마세요.”
진이 뒤돌아서려는 란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 하는 짓이야?”
“일주일만…딱 일주일만, 배워봅시다. 한글.”
란은 기가 차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직도 우리말 타령이야? 난 그런 거 몰라도 수백 년, 아니, 오랜 시간 잘 지내왔어. 그러니까 나한테 이만 신경 끄고, 이 마을의 인간들이나 잘 가르치다 올라가.”
란이 마지막으로 옅게 미소 지은 뒤 진을 등진 채 걸어가기 시작했다.
“함께하면 안 되겠습니까?”
란의 뒤로 진의 목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란은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보고 싶을 것 같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여름이 오는 순간마다, 이 꽃을 닮은 당신이 생각날 것 같아요.”
“우린 단지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야. 그렇게 쉽게 단정 짓지 마.”
란이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은 채 진에게 답했다.
“진심입니다.”
“인간의 마음보다 변하기 쉬운 건 없어.”
“약속하겠습니다, 변하지 않겠다고. 그러니 일주일만 기회를 주세요. 부디, 저에 대해 알아가 주세요.”
란의 마음 깊은 곳이 요동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동안 혼자 모든 것을 견뎌왔는데, 저 남자와 엮이게 된다면 어쩌면 더는 혼자가 되는 일에 익숙해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영겁의 삶 속에 한 번쯤 변수를 두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 않을까. 관성적으로 흘러가는 무망 한 삶 속에, 한 번쯤 선물 같은 기회가 허락되어야 하지 아닐까.
“…실망시키기만 해 봐. 죽여 버릴 거야.”
진은 란의 협박 아닌 협박에 실소를 터트렸다. 란 또한 진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그렇게 란과 진의 붉은 연은 서로를 향한 미소 속에 조심스레 첫 매듭을 짓기 시작했다.
이후 란은 진에게 매일 우리말을 배워나갔다. 우리말은 란의 무료한 삶 속에 새로운 생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이름과 진의 이름을 한 획씩 또렷이 적어갈 때면, 잔잔한 설렘의 감정들이 꽃잎이 되어 자신에게 내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란은 한여름의 출발점에서 둘을 위한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글을 배운 지 일주일이 되던 날. 란은 학교 내 느티나무 아래에 서서 수업 중인 진을 몰래 기다리고 있었다. 용기 내어 진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서.
“너, 듣고 있지?”
란이 느티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신령이 될 수도 있겠다.”
란은 손가락 끝으로 느티나무를 살짝 두들겨 보았다. 뒤이어 멍하니 불 켜진 교실을 지켜보았다.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알 수 없어. 전엔 그저 어리석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남자를 만난 후엔 오히려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야. 이상하게 그 남자는 끊임없이 날 일깨워줘. 그래서, 아무 의미 없던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싶게 만들어.
난 그게 좋은데, 정말 좋은데…너무 무섭기도 해. 그 남자는 어차피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질 테니까……. 제발 그 남자가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그 옆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오래 살아있어 줬으면 좋겠어. 어떠한 모습이든 계속 바라볼 수 있게.”
교실 창을 바라보던 란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씁쓸한 란의 표정이 느티나무에게 더욱 또렷이 전달되었다.
느티나무는 상상할 수 없었다. 인간을 사랑하는 감정이란 어떤 것일까.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 만약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면, 자신도 란처럼 저런 표정을 짓고 저런 감정을 지니게 될까.
“언젠가 말이야, 그 남자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오면 꼭 알려줘. 나에겐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구해야 하는 사람이거든.”
느티나무는 란의 말을 받아들인다는 표시로 자신의 나뭇잎 부드럽게 흔들어 보였다. 란은 밝은 미소로 고마움을 전했다.
그 순간, 란의 뒤편에서 진과 닮은 중년의 순사가 다른 순사들을 이끌고 학교로 들어섰다. 이어, 수업을 마친 진이 친우들과 함께 웃으며 학교 건물을 빠져나왔다. 마치 이야기의 끝을 전혀 모르는 듯 평화롭고 환한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