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 밖을 나선 란은 어느새 초록 바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바다의 파도가 긴 시간 동안 쌓아 올린 해묵은 감정을 씻어낼 듯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바다 위 해는 점점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눈부신 석양 아래, 모래 위에 핀 연노란색 해란초가 여름의 생명력을 다해 시들어가고 있었다. 란에게 있어 해란초는 자신과 ‘너’를 이어주는 유일한 피사체였다.
‘태양 가득한 여름, 싱그러운 햇살을 맞으며 너를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그 여름날처럼, 노란빛으로 반짝이는 해란초를 함께 바라보고 싶었는데…….’
란에게 ‘너’라는 사람은 억겁의 시간이 빚어낸 무망함의 늪 속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준 단 하나의 존재였다. 그런 ‘너’가 떠난 뒤 그 세계는 무너지고, 해란초가 피는 여름마다 기약 없는 기다림만 모래성처럼 쌓아갔다. 그런데 오늘,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는 순간이 오면 어린 소년의 모습이면 좋겠다던 ‘너’의 그 바람처럼, ‘너’는 앳된 모습으로 란의 앞에 나타났다. 아무런 예고도, 예언도 없이 란의 집 앞에서.
란은 붉게 타오르는 주황빛 하늘을 바라보며 ‘너’와 함께했던 최초의 순간으로 서서히 기억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1932년 어느 여름밤. 20대 여성의 모습을 한 란이 모던한 연노란색 투피스를 입고 해송 보통학교를 지나고 있었다. 조용하던 마을의 학교가 갑작스레 많아진 사람들로 부산스러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란은 오래간만의 북적거림에 의아함을 가지며, 교문 앞에 서서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곳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젊은 남녀가 인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새파란 그들의 손에는 책이 한 권씩 쥐어져 있었다. 긴장한 듯, 자랑스럽게.
“들어갈 것입니까?”
불쑥 란의 뒤에서 차분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란은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갸름한 턱선과 하얀 얼굴, 반듯하고 곧은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가 란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말갛고 단정한 이미지와 어울리는 연하늘색 셔츠를 차려입고, 오른손에 교문 안 젊은이들처럼 책을 들고 서 있었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란은 재빨리 당혹스러운 표정을 걷어내고 날이 선 태도로 남자에게 물었다.
“우리는 여름 동안 이곳에서 우리말을 가르칠 겁니다.”
남자가 자신에 찬 표정으로 손에 쥔 책을 들어 보였다.
“왜 그런 일을 하려는 건데?”
“잃어버린 나라의 힘을 되찾고 싶으니까요.”
“그 힘, 잃어버린 지 30년이 다 돼가. 그런데 갑자기 이런 촌구석에 들어와서 그깟 종이 덩어리로 뭘 하겠다는 거야. 도둑들을 상대하고 싶으면 차라리 총이나 칼을 들어. 그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물론 무장투쟁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교육을 통한 계몽도 조국의 빛을 되찾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답답하네, 정말…….”
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말을 배워보시겠습니까?”
“…뭐?”
“배우시면 분명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내일 이 시간,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마침 내일은 학교에서 수업이 없는 날이니 조용히 배우실 수 있을 겁니다.”
“이봐. 난 전혀 배울 생각이…”
“이진, 빨리 와-! 수업 늦겠어-!”
긴 생머리를 한 또래 여자가 멀리서 남자를 재촉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남자는 란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 뒤 교문을 지나 교사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학교 현관문 앞에 멈추어 뒤돌아선 다음 란을 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제 이름은 이진입니다-! 아가씨께선 존함이 어떻게 됩니까-?!”
“…란.”
“네-?! 잘 안 들립니다-!”
여러 소리에 란의 목소리가 묻혀 남자에게 닿지 않았다.
“박란-! 박란이라고-!”
란은 태어나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름을 소리쳐 말했다. 란의 이름을 들은 남자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든 뒤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란은 남자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