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시간은 9월의 끝으로 접어들었다. 해음은 자신을 따라오겠다는 초록을 떼어놓고서 홀로 외출 중에 있었다. 경찰서에 들러 핸드폰을 돌려받은 뒤 편의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초록과 란에게 줄 민트 초코아이스크림과 약과를 사러 갈 생각이었다.
해음이 편의점 앞에 다다랐을 때, 한 남자아이가 이제 막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교복 입은 학생들에게 놀림을 받고 있었다.
“와, 이 새끼 진짜 가난한가 봐. 옷이랑 신발 좀 봐. 진짜 낡았어.”
“야, 너희 부모님 뭐 하시냐? 거지냐?”
학생들은 남자아이를 향해 비웃기 시작했다. 남자아이는 자신을 향한 조롱이 더없이 익숙하다는 듯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과 야유를 뒤로한 채, 담담히 편의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지나지 않아 남자아이의 앞을 한 남학생이 가로막고 섰다.
“거지새끼가 편의점에서 물건 살 돈은 있냐?”
남학생의 말에 학생들은 다시 한번 남자아이에게 조소 섞인 웃음을 보냈다. 이번에도 남자아이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힐난을 아무 저항 없이, 있는 그대로 묵묵히 받아냈다. 남자아이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 비참한 시간이 부디 빨리 지나길 바라며 참고 견디는 것뿐이라는 걸.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해음이란 변수가 남자아이와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해음은 더 이상 남자아이가 몰지각하게 상처받는 광경을 방관할 수 없었다.
“야-! 이 어린놈의 자식들이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와선! 너희들, 당장 얘한테 사과해. 평생 가해자 꼬리표 단 채 살고 싶지 않으면.”
“아이씨! 아줌마가 뭔데 끼어들어요. 상관 말고 곱게 가던 길 가세요.”
여전히 남자아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남학생이 꼴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해음에게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점차 주변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해음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뭐?!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너 내가 명찰에 이름 딱 봐놨어. 내일 교무실로 불려 갈 준비나 해.”
“아 진짜, 재수 없게…야, 가자! 퉤-!”
남학생은 바닥에 침을 뱉고 해음을 째려본 뒤 다른 학생들을 이끌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괜찮아?”
해음이 남자아이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네…고맙습니다…….”
타인의 도움에 익숙지 않은 남자아이는 해음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릇된 관심이 아닌 진심 어린 관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었다.
“쟤들이 너한테 그런 식으로 대한 거, 절대 너 잘못 아니야. 저 못난 놈들이 자기들 마음속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비겁하게 너에게 해소하려고 한 것뿐이야. 그렇게 누군가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동안에는, 순간이나마,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마주해야 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거든. 그러니까 넌, 이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더라도 스스로 탓하거나 위축되지 마. 알았지?”
해음의 말에 남자아이는 용기 내어 해음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살짝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해음의 눈에 비친 남자아이의 얼굴은 아직 앳되었지만 선하고 반듯한 올곧음이 베어져 있었다.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눈빛 속에, 시대를 거스른 고전적인 분위기가 미묘하게 감돌았다.
“들어가자. 누나, 아니 이모가 필요한 거 사줄게.”
“괜찮아요.”
“이럴 땐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받으면 돼. 살면서 이런 기회가 흔치 않아요, 친구야.”
“…감사합니다.”
쭈뼛거리며 인사하는 남자아이의 모습이 귀여워 해음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곧 진지한 표정으로 남자아이에게 말했다.
“무시당하는 데 익숙해지지 마. 그 익숙함의 대가로 언젠가 너 자신을 포기하게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몰라.”
해음은 과거, 한없이 무기력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남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구도 바라봐 주지 않던 그 시간, 나마저도 나를 침묵했던 그때의 자기를 위로하듯이.
이후, 해음과 남자아이는 나란히 산속을 걸어 올라갔다. 함께하는 산행 속에서 해음은 남자아이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남자아이의 이름은 김우진이며,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것. 유일한 동거인이자 보호자로 엄마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뿐인 존재로부터 지속적인 정서적 학대와 방임을 받고 있다는 것.
우진은 해음과의 대화에서 단 한 번도 엄마를 향한 미움이나 원망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릇된 엄마의 언행을 이해해 보려는 고운 의지와 부족한 엄마의 모습도 만족하고 사랑하려는 따뜻한 순수함을 드러내 보였다.
마치, 황량하고 척박한 모래사막 속에서 오아시스 넘어 자신만의 꽃을 틔워낸 것 같았다.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기 위해.
함께 대화를 나누며 어느덧 두 사람은 란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미래가 꼬리를 흔들며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 미래, 잘 놀고 있었어? 초록아, 란아! 간식 사 왔어! 나와서 먹어!”
해음의 목소리에 란이 먼저 자신의 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란아. 내가 손님을 한 명 데리고 왔는데…”
남자아이를 바라보는 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감으로 뒤덮이다, 차츰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서러움으로 물들어 버렸다. 란은 갑작스레 함부로 내리는 눈물을 감추고자 빠르게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이내 다급히 앞으로 나아가 도망치듯 집을 떠났다.
난생처음 보는 여자아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우진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위축돼 버렸다. 해음은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서있었다. 방금 전, 란의 표정이 해음의 머릿속에 강하게 아로새겨졌다. 무언가 아주 오래전, 깊게 묻힌 기억을 건드린 듯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