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미래(完)

by 지수

이후 란은 집주인으로부터 그날 밤의 기억을 모두 지워냈다. 그리고 무의식 깊은 곳에 개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 두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조여와, 함부로 다루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뒤이어, 집주인에 대한 신고도 이루어졌다. 경찰 조사는 겨우 살려낸 해음의 폰과 트럭의 블랙박스를 토대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집주인은 동물보호법 위반과 협박죄로 벌금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진돗개에 대한 소유권 포기 각서 또한 제출하였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맡은 생명에 책임지지 않은 결과였다.

사건이 마무리되어 가는 동안, 다 같이 마을 내 가장 가까운 동물병원에 방문하였다. 다행히 진돗개의 건강 상태는 우려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았다. 뱃속의 새끼도 잘 자라고 있으며, 한 달 뒤쯤에 출산할 것 같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해음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 작은 생명과 함께,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마음속에 살며시 피어올랐다.



“우린 바다로 가야 해.”

갑자기 란이 평소 자주 가는 바닷가로 모두를 이끌었다. 바다로 향한 이유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에겐 어떤 존재의 소중한 추억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고 언급할 뿐이었다.

넷은 같이 모래사장 위에 일렬로 앉아 가을 바다를 바라보았다.

“네가 사랑한 파란 바다는 아니지만, 초록 바다도 꽤 봐줄 만하지?”

란이 잔잔히 일렁이는 녹색 물결을 바라보며 진돗개를 다정히 어루만졌다. 진돗개는 초록빛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지만, 마음의 눈을 통해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지금 함께 바라보는 저 바다는 회색빛이 아닌 그 어떤 색보다 아름다운 초록빛을 품고 있다는 것을.

진돗개는 조용히 란의 손길을 받은 다음 몸을 일으켜 초록에게 다가갔다. 그 뒤 초록의 바지를 살짝 물며 꼬리를 흔들었다.

“같이 놀고 싶어?”

초록이 미소를 머금은 채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일어났다. 그리고 곧 진돗개와 함께 아이처럼 해맑게 모래사장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더 이상 초록이를 무서워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해음이 가을 햇살 아래 반짝이는 초록과 진돗개를 바라보며 란에게 말했다.

“선은 그런 거야. 악은 결국엔 스스로를 고립시키지만, 선은 어떠한 순간에서든, 어떠한 방식으로든 서로를 연결시키는 법이거든.”

란의 대답을 들은 해음은 잔잔하게 미소 띤 얼굴로 란을 응시했다.

“고마워, 산신. 네가 아니었다면 저 아이가 저렇게 밝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 거야.”

“그날 밤, 너의 용기가 있어서 가능했어. 이젠 그 용기를 자신을 사랑하는 데 사용해 보는 게 어때? 더는 죽고 싶다는 생각 따위 하지 말고.”

“…내가 그럴 수 있을까?”

해음의 말에 란이 한참 초록 물빛을 응시하다 말문을 열었다.

“너희 엄마를 이 바닷가에서 만났었어. 산속에 귀신 나오는 집에 산다고 모두가 날 피했었는데, 너희 엄마만은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어줬지. 그때, 나에게 이렇게 말하더라. 먼저 간 남편이 그리울 때마다 바다를 보러 온다고. 바닷소리를 아주 사랑했던 사람이라, 가끔은 먼 하늘에서 이곳으로 내려오지 않을까 싶다고.”

“…바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삼켜버렸는데, 왜 엄마는 여전히 바다를 미워하지 않았을까.”

“이봐, 여자 사람. 너희 아빠가 바닷속에서 생을 다해가는 그 순간에, 바다를 원망했을 거라 생각해?”

“…….”

란의 물음에 해음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엄마의 이야기 속에서 아빠는 늘 바다와 함께할 수 있어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묘하게, 그 말을 하는 너희 엄마에게서 물의 향이 강하게 느껴졌어. 그리고 그 향은, 생의 끝을 가리키고 있었어. 난 경고했어. 물로 인해 마지막을 볼 수 있는 운명이니, 언제나 물을 경계해야 한다고. 그랬더니 너희 엄마가 나에게 뭐라고 답한 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

“자기는 다 괜찮다고. 자기 딸만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 수 있다면, 자신의 마지막이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다고.”

해음의 두 눈동자에 빠른 속도로 눈물이 차올랐다. 불현듯 차가운 빗물 속에서 자신의 생과 멀어져 가던 엄마의 모습이 선연히 그려졌다.

해음은 이미 지나온 시간 앞에 목 놓아 호소하고 싶었다. 현실에 짓이겨 힘들다고 투정 부리던 못난 딸보다, 빈틈없이 이기적이어도 좋으니, 부디 자신만을 먼저 생각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해음은 그날, 그 장소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오롯이 자신의 시간을 흘려보냈던 스스로가 미웠다.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선 죄책감과 무력감이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은 다른 해석을 떠올리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설사 자신으로 인해 실현된 운명이었다 할지라도, 엄마는 그 결과에 대해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록과 란의 말처럼, 오히려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는 본인이 아닌 남겨질 자신을 걱정했을지 모른다. 거센 비바람과 함께 닥쳐온 본인의 운명을 피하지 않고, 홀로 살아갈 딸의 행복을 간절히 바라며 다른 세상을 향해 눈 감았을지 모른다.

“용기 내서 가감하게 행복해져. 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고, 그럴 수 있는 존재야.”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해음에게 란이 자기만의 위로를 건넸다. 따뜻한 눈물이 해음의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해음의 마음속에 침잠해 있던 희망이란 단어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노력해 볼게. 남은 삶은 부디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마땅히 그래야지. 너에겐 그럴 의무와 자격이 있으니까.”

해음이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란의 이름을 말하며 질문했다.

“그런데 란이 넌 왜 이 바다에 자주 오는 거야?”

“보고 싶어서. 가을이 깊어지면 더는 보지 못하니까.”

란이 모래언덕 위에 피어난 노란 해란초를 응시하며 나지막이 답했다. 란의 표정엔 평소와 달리 알 수 없는 먹먹함이 담겨 있었다. 해음은 갸우뚱하며 란과 해란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바다보다 바다에 핀 꽃에 시선을 두는 란에게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축하해.”

대뜸 란이 초록과 진돗개를 바라보며 해음에게 말했다.

“갑자기 뭘 축하한다는 거야?”

“저 멍청이랑 진돗개 사이에 붉은 실이 생겼어. 연을 맺게 된 거야.”

평범한 인간인 해음의 눈엔 붉은 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란의 말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두 손을 꼭 모았다.

“정말이지? 그럼 세 가지 연중에 첫 번째 연이 완성된 거야?”

란이 한쪽 입가를 슬쩍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록아-!”

해음은 초록과 진돗개가 있는 곳으로 곧장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초록은 그제야 자신의 오른쪽 새끼손가락과 진돗개의 오른쪽 발 사이에 맺어진 붉은 실을 발견하였다.

“고마워, 해음아. 미래를 안겨줘서.”

초록이 진심 어린 눈빛으로 해음을 바라보았다. 해음은 밝은 미소로 초록의 마음에 답했다.

“초록아. 얘 이름 미래로 짓는 거 어때? 첫 번째 미래를 선물해 줬으니까.”

해음의 말에 진돗개가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진돗개는 떠나간 할머니를 통해 이미 몸소 체득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름을 붙여준다는 건, 앞으로의 시간도 함께하겠다는 사랑과 책임의 표현이라는 것을.

“나도 좋아.”

초록이 무릎을 살짝 굽힌 다음 해음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내 마음속으로 간절히 소망하였다. 해음의 저 웃음이 부디 영원할 수 있기를.

‘파도가 멈추는 순간까지 네 곁에 있어 주고 싶어.’

찬란한 가을 햇살 아래, 해음과 초록은 서로를 마주 보며 환히 미소 지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언젠가 사라질지 모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잠시나마 푸르른 하늘 위로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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