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미래(6)

by 지수

4년 전, 어느 화창한 봄날. 저는 바닷가 근처 작은 집에서 태어났어요. 저의 주인은 저를 보며 항상 따뜻하게 웃어주던 주름이 고운 할머니였어요. 저는 할머니와의 바닷가 산책을 가장 좋아했어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모래 위를 걷다 보면, 온 세상이 파란빛으로 물드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할머니가 갑자기 집 앞마당에 쓰러졌어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할머니를 지켜야 하는데, 소리치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할머니는 늘 저에게 예쁘다고 말해주었지만, 그날 저는 제가 처음으로 못나 보였어요.

아무리 낑낑대고 발로 밀어 봐도, 할머니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어요. 다행히 얼마 뒤, 옆집 할머니가 우리 집에 들어왔어요. 옆집 할머니는 주인 할머니를 살펴본 다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어요. 갑자기 시끄러운 차 소리가 들리고,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할머니를 데려갔어요.

이후 저는 할머니를 계속 기다렸어요. 할머니가 예전처럼 곱게 미소 지으며 대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를 토닥여줄 것만 같았어요.


시간이 흘러, 배가 너무 고팠던 저는 집 밖을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돌아올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결국, 집 밖으로 나간 저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열심히 먹이를 찾아다녔어요. 하지만 어떤 것도 구할 수 없었어요. 두 귀와 두 발이 점점 얼어붙어 갔어요. 저는 너무 힘들어서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어요. 그리고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할머니와 함께 모래사장을 뛰어노는 꿈을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다시 눈을 떴을 땐, 낯설고 무서운 좁은 철장 안에 갇혀 있었어요. 주위에 저랑 비슷한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 친구들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요. 너무 아프고 지쳐 보였어요. 그때 제 옆에 있던 한 친구가 말했어요. 여긴 끊임없이 새끼를 낳고 이용당하는 곳이라고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저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곧 알게 되었어요. 이후 그곳에서의 제 삶은 새끼를 배고 낳고 잃는 과정의 반복으로 무너져 갔어요.

그날 제가 할머니를 구하지 못해서 이런 벌을 받는 것 같았어요.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내가 있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런 날은 계절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저는 하루하루 무기력해져 갔어요.


그러던 올해 봄. 건조한 공기가 가득했던 어느 새벽에, 우리를 괴롭히던 아저씨가 철장 앞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사라졌어요. 잠시 뒤, 담배꽁초에서 불이 붙기 시작하더니 점점 철장 안으로 번지기 시작했어요.

저는 친구들과 힘을 모아 새끼들을 데리고 철장을 나가보려 했어요.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어요. 불길이 점점 더 크게 위로 올라갔어요. 매캐한 공기가 코를 뚫고 들어와 숨을 쉴 수 없었어요. 새끼들은 이미 깊은 잠이 든 것 같았어요. 제가 아무리 앞발로 만지고 혀로 핥아봐도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 순간, 다시는 깨어날 수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이번에도 저는 소중한 존재를 지켜낼 수 없었어요. 이제는 무지개다리를 건너 할머니와 친구들, 그리고 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빨리 가고 싶어 졌어요.

자꾸만 눈이 감겨 가던 그때 철장 문이 열리고, 가끔 우리에게 먹이를 주었던 아저씨가 저를 데리고 철장 밖으로 뛰어갔어요. 저는 저를 구해준 아저씨를 쳐다보며 생각했어요. 저의 두 번째 주인이 나타났다고요. 그리고 앞으로 남은 매일을 아저씨에게 충성해야겠다고요.

아저씨는 하얀색 트럭에 나를 싣고 어디론가 달려갔어요. 그리고 흰 가운을 입은 사람에게 저를 맡겼어요. 그 뒤로 저는 치료를 받고 다시 아저씨를 만나, 아저씨의 집으로 함께 향했어요. 그런데 집에 도착한 아저씨는 이상했어요.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기분이 좋지 않은 밤이면 저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어요.

아저씨의 행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어요. 이전의 못된 아저씨처럼 제가 억지로 새끼를 배게 만들었어요. 저는 키 큰 남자가 너무 무서워졌어요. 어떤 날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겁이 나서 집을 나오기도 했어요. 물론 다시 돌아갔지만요. 저는 차마 아저씨를 떠날 수 없었어요.


어느 날, 그날 밤도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우연히 언니와 마주치게 되었어요. 언니는 다른 사람들처럼 저를 피하지 않고 쓰다듬어 주었어요. 예전에 할머니가 절 만져주었던 것처럼요. 저는 언니 옆에 계속 있고 싶었어요. 그런데 언니를 향해 뛰어오는 키가 큰 남자를 보고 겁이 나 얼른 도망쳤어요. 저를 해칠지 모르니까요.

다음 날, 언니랑 남자가 다시 제게 찾아왔어요. 언니는 반가웠지만, 키가 큰 남자는 여전히 무서웠어요. 그런데 나무 향이 나는 남자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제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어요. 제가 두려워한다는 걸 알고 더는 다가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매일 언니와 함께 저를 찾아와 맛있는 간식을 주었어요. 덕분에 키 큰 남자도 무섭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요.


산신님. 오늘 밤 절 구하러 온 언니를 보고, 저도 용기를 내고 싶어 졌어요. 하지만 저는 아저씨가 잘 못 되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날 불길 속에 죽어가던 저에게 다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해 주었잖아요. 이제는 그만 아저씨를 용서하고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더 이상 반복되는 두려움에 떨고 싶지 않아요. 제가 조금 더 용기를 낸다면, 앞으로 제 삶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못난 저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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