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미래(5)

by 지수

‘결국…맞이해야 할 끝은 이런 모습이구나…….’

해음이 모든 걸 체념한 채 눈을 감던 그 순간, 앞뒤로 익숙한 목소리들이 겹쳐 들려왔다.

“멍멍!”

“해음아!”

“야! 여자 사람!”

“끼익-!”

혼미해진 의식을 붙여 잡고 해음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트럭이 바로 자기 앞에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앞쪽에선 진돗개가, 뒤쪽에선 초록과 산신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도착했지만, 진돗개의 발걸음이 해음에게 먼저 와닿았다. 목줄이 채워져 있던 진돗개의 목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고, 조금 전 구타당했던 흔적들이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언니 구해주러 온 거야? 이 몸으로?”

해음이 두 눈을 글썽이며 진돗개를 어루만졌다. 진돗개는 해음을 바라보며 혀를 내밀고 꼬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곧 고개를 돌려 트럭을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해음아,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초록이 무릎을 굽혀 다급히 해음을 살펴보았다.

“초록아…!”

초록의 얼굴을 마주한 해음은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초록은 해음을 껴안은 다음 천천히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이제 괜찮아, 해음아.”

“이번에도…다 망쳐 버렸어…휴대폰 안에 증거들이 있는데 떨어뜨려 버렸어. 이대로 망가지면 어떡하지? 이번엔…이번엔, 정말로 잘 해내고 싶었는데…….”

해음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울먹이며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망치지 않았어, 해음아. 네가 무기력했던 저 아이를 여기까지 달려오게 만든 거야. 그리고, 박란과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어.”

초록의 말에 해음은 더욱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여자 사람, 그만 좀 울어. 그러니까 겁도 없이 밤중에 혼자 여길 왜 찾아와.”

란이 괜스레 해음에게 핀잔을 주었다.

“야. 너희들 뭐야.”

집주인이 트럭에서 내린 다음, 짜증 가득한 얼굴로 눈앞의 상황을 응시했다.

“저 개새끼, 어쩐지 요즘 살이 붙는다 했더니 너희들 짓이었나 보네. 너희들 뭐 하는 자식들이야.”

집주인이 성이 난 걸음으로 해음의 무리 쪽으로 다가왔다. 이에 란이 신물 난다는 듯 싸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검은색 눈동자를 차츰 붉은색으로 물들여갔다. 갑자기 집주인이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르기 시작했다.

“이제 좀 얌전해졌네.”

란이 조소 섞인 눈빛으로 집주인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살…살려줘…….”

집주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겨우 소리 내어 말했다.

“싫어. 내가 왜 너 같은 쓰레기를 내 산 밑에 둬야 해?”

란이 집주인에게 한 걸음씩 걸어갔다.

“켁켁…!”

집주인은 곧 죽을 것 같은 형태로 두 무릎을 꿇었다. 꺼져가는 자신의 목숨 앞에서 마침내 생사의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느낌이 어때? 생이 끊어져 가는 느낌 말이야.”

란은 바닥에 몸을 바짝 붙인 집주인의 모습을 눈앞에서 찬찬히 응시하였다.

“죄…죄송합…!”

“아니지. 잘못은 내가 아니라 저 개한테 빌어야지. 네가 그 역겨운 생각과 행동으로 앗아가려 했던 생명에게.”

“읍…!!”

집주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온몸이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해음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란에게 다가갔다.

“저런 인간 때문에 힘쓸 필요 없어. 이 뒤는 경찰에게 맡기자.”

“야, 여자 사람. 넌 법으로 저 쓰레기를 치울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 힘들 거야.”

“그럼 왜 날 막는 건데?”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던 흔적들을 남기고 싶으니까. 그 흔적들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간 변하겠지. 아주 작은 것들마저도 지킬 수 있는 방향으로. 그러니까, 저 인간은 지금 여기 남아 있어야 해. 오늘의 흔적을 위해서.”

해음의 말이 끝날 때쯤 진돗개가 바닥에 누워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집주인에게 달려갔다.

“무엇보다 진돗개가 저 인간의 죽음을 원하지 않잖아.”

붉게 타들어 가던 란의 눈동자가 조금씩 본연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집주인은 자신의 목을 조르던 두 손을 놓은 다음 의식을 잃고 기절해 버렸다. 한동안 모두 아무 말 없이 집주인과 그 옆의 진돗개를 지켜보았다.

잠시 뒤, 란이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과 함께 입술을 떼었다.

“오랜만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보네.”

돌연히 란이 초가을의 달빛을 받으며 사람에서 다른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갔다. 산이 품은 오랜 정기가 란의 몸을 감싸는 듯했다.

“어…? 토끼가 된 거야, 지금…?”

해음은 새하얀 산토끼로 변해버린 란을 휘둥그레 내려다보았다. 급작스레 눈앞에 펼쳐진 환상은 다소 낯설고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따스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눈높이를 맞추려고 그런 거야. 보다 마음을 잘 읽을 수 있게.”

가만히 그 모습을 응시하던 초록이 나직이 말했다. 산토끼가 된 란은 진돗개 옆으로 다가가 진돗개의 까만 눈동자를 잔잔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진돗개의 앞발에 자신의 앞발을 살포시 올려다 놓았다. 그때, 진돗개가 겪어 온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이 란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한 편의 동화를 읽는 것처럼, 진돗개가 보고 느낀 모든 세계가 한 장 한 장 펼쳐 지나갔다. 바다에 피어난 봄날부터 철창 안의 고요한 어둠까지, 수많은 시간이 해일처럼 밀려와 란의 안으로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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