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5년 8월 말, 여름의 끝자락. 10살의 바다가 비 내리는 창밖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다의 책상 위에 펼쳐진 그림책에서도 지금처럼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느티나무가 처음으로 여자아이를 만나는 장면이었다.
“드르륵-”
바다가 막 그림책에 집중하려던 찰나, 담임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3학년 4반, 모두 집중! 오늘부터 아주 멋진 친구가 함께하게 됐어요. 다들 사이좋게 지내야 해요, 알았죠?”
“네-!”
아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반 전체를 가득 메웠다.
“좋아요. 그럼 이제 새로 온 친구를 불러 볼까요? 어서 들어와요-!”
곧 갈색 머리에 암녹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아이가 천천히 교실로 들어섰다.
“반 친구들에게 자기소개 부탁해요.”
남자아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차분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내 이름은 박솔이야. 앞으로 잘 지내보자.”
바다는 솔이를 바라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낯익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로부터 오래된 기억의 조각이 문득 깨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끝내 그 기억의 뿌리를 떠올리지 못하고, 단지 꿈속에서 비슷한 아이를 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순간, 그림책 속 남자주인공의 모습이 바다의 눈에 들어왔다. 바다는 잠시 상상했다. 남자주인공이 어린아이라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솔이가 바다의 앞자리에 앉자, 익숙한 향기가 살며시 전해졌다. 여름의 나무를 닮은 향이었다. 바다는 애써 솔이를 향한 시선을 거둔 채, 자신의 그림책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쉬는 시간, 강당으로 이동하던 바다가 불쑥 솔이의 앞으로 그림책을 떨어뜨렸다. 솔이는 책을 주워 잠시 응시한 뒤 바다에게 건넸다.
“고마워.”
바다가 빨개진 얼굴을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림책,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야.”
그 말에 바다는 고개를 들어 솔이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마음 어딘가가 괜스레 몽글거렸다.
“친하게 지내자, 우리.”
솔이가 따뜻이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바다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그 손을 잡았다.
특별 수업 시간, 20대의 우진이 모교로 방문하여 육상선수로서 자신의 삶을 소개했다. 우진은 자꾸만 바다, 솔이와 눈을 마주치며 반달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두 아이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후 수업이 끝나갈 때쯤, 노란색 운동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팔을 번쩍 들고 우진에게 질문했다.
“왜 육상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우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잔잔히 웃으며 답했다.
“육상선수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그때 정말 힘들었는데, 어떤 이모랑 삼촌이 제게 먼저 손을 내밀어줬어요. 아주 기적처럼요.
그 후 우연히 용기를 내서 운동회 계주로 뛰게 되었어요. 그때 느꼈던 가을바람과 함성 소리, 응원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잊히지 않았어요. 정말 행복했거든요. 온전히 저 자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 소중한 경험은, 아마 절 살려줬던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절대 겪을 수 없었을 거예요. 아직까지도 그 경험이 매 경기마다 저에게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전 지금의 제가 있도록 만들어준 두 사람에게 평생 감사하며 살아갈 거예요. 여러분들도 부디 앞으로 걸어갈 삶 속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우진의 말에 바다의 크고 깊은 두 눈이 차츰 붉어져 갔다. 마음 깊은 곳에서 크나큰 행복의 파도가 밀려왔다. 바다에게 오늘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 속에 잠겨있던 하루였다.
그날 밤, 바다는 아빠와 엄마가 번갈아 읽어주는 ‘초록나무 이야기’를 들으며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바다는 지금과 같은 아이의 모습으로 초록빛 느티나무와 여러 순간을 함께했다.
그러다 어른의 모습으로 변해, 갈색 머리에 진녹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와 죽어가던 세 번의 삶을 구해냈다. 이후 남자와 작별의 시간을 가진 다음,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에 피어난 불길 속에서 초록빛 느티나무와 나란히 마지막을 맞이했다.
길었던 꿈의 끝에서 눈을 뜬 이른 새벽. 바다는 눈물과 땀으로 가득 젖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에선 어느새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바다는 초록색 우비와 가방을 챙긴 다음 다급히 현관문을 나섰다. 이후 쏟아지는 장대비를 뚫고, 앙상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옛 폐교를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폐교 안으로 들어선 바다는 느티나무가 있던 자리를 파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조그만 손에 진흙이 잔뜩 묻은 채, 반쪽짜리 그림책 한 권과 편지들을 발견해 냈다. 바다는 그것들이 더 이상 젖거나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가방으로 집어넣었다. 그때, 한 아이가 비를 맞으며 바다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마치 그 자리에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빗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는 숨죽여 그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바다가 이미 알고 있던, 갈색 머리와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아이였다.
마침내 환생한 서로를 알아본 둘의 모습을, 20대의 란과 우진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연하늘색과 연노란색 우산 아래에서, 노견이 된 미래와 성견이 된 현재와 함께.
“란이 네가 그동안 잘 간직해 준 덕분에 두 사람이 서로의 이야기를 되찾을 수 있게 됐어.”
우진이 환한 미소를 띠며 란에게 말했다.
“그렇게라도 지켜주고 싶었어. 그때 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으니까. 산신인 내가 조금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어쩌면 둘은…….”
란이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너 잘못 아닌 거 알잖아. 이제 그만 자책해, 란아. 결국 새로운 운명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까.”
란이 천천히 얼굴을 들어 우진을 바라보았다. 우진은 처음 그날처럼 란을 향해 싱긋이 웃어주었다.
어느덧, 해송마을에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 바다는 여전히 자신과 솔이를 지켜보는 그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솔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먼저 날 알아봐 준다며.”
솔이가 두 눈에 고인 눈물을 꾹 참아내며 밝게 미소 지었다. 바다는 잠시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해맑은 얼굴로 솔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 초록아.”
눈부신 아침 햇살 아래, 두 사람이 함께 웃음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발아래에 고인 초록 물빛이 떠오르는 태양을 품고 찬란히 일렁였다.
또다시, 초록의 계절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