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석별(完)

by 지수

해음이 홀로 거리를 걷던 중, 초록과 헤어지던 그날처럼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해음은 점점 굵어지는 흰 눈을 맞으며 폐교로 향했다. 초록은 마지막 그날, 바다에서의 모습이 아닌 나무의 모습으로 하얀 눈꽃을 돋우고 있었다. 해음은 가만히 초록을 올려보다가, 목도리를 벗어 초록에게 둘러 주었다.

“해피 홀리데이!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초록아.”

해음은 메고 있던 진녹색 가방에서 산타와 루돌프가 그려진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이어 초록 아래 새하얀 흙을 파낸 뒤, 편지들이 가득 담긴 틴 케이스를 열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쥐고 있던 크리스마스 카드를 집어넣었다. 해음의 사계절이 담긴 편지들이 초록의 뿌리 가까운 곳에 한층 더 차곡히 쌓여갔다.

“어우, 손 시려. 장갑도 짜주고 가지.”

해음이 손에 묻은 눈과 흙을 털어낸 다음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두 손을 비볐다.

“초록아. 나 다음 주에 우진이 어머니가 소개해주신 출판사로 회의하러 가. 네가 곁에 있었으면 정말 축하해 줬을 텐데…….”

해음이 한 번 더 초록을 물끄러미 올려다본 뒤,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해음의 손끝이 점점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해음은 완성된 조그만 눈사람을 초록의 옆에 나란히 두었다.

“혼자 있으면 심심할 것 같아서 특별히 만들어주는 거야. 눈사람 친구랑 성탄절 밤 잘 보내.”

해음은 뿌듯한 얼굴로 초록과 눈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초록의 곁에 앉아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앞으로 그림책 출간 준비 때문에 더 바빠질 것 같아. 어쩌면 당분간 서울에 계속 있어야 할지도 몰라. 그래서 말인데, 내가 혹시 자주 못 오게 되더라도 삐지면 안 돼. 대신 그림책 나오면 꼭 너에게 제일 먼저 보여줄게. 그때까지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해음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흰 눈으로 뒤덮인 초록을 쓰다듬었다. 초록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잎 하나 없는 마른 가지에 눈꽃을 이고, 겨울의 수목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2025년 3월 말, 해음의 그림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해음은 설레는 마음으로 초판을 들고, 곧장 초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표지에는 ‘초록나무 이야기’라는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

“짠-! 초록이 너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이야.”

해음이 해맑게 웃으며 책을 높이 들어 보였다.

“네가 없었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거야. 진심으로 고마워, 초록아. 무너진 내가 다시 한번 세상 속에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줘서.”

보다 더 따스하고 건조해진 바람이 해음과 초록을 향해 불어왔다. 해음은 초록 곁에 그림책을 조심스레 내려둔 다음, 두 눈을 감고 찬찬히 봄의 시작을 느꼈다. 이어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아 불어오는 봄바람을 타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초록이 길고 어두웠던 겨울을 넘어, 따뜻한 봄날 속에서 운명의 꽃을 피울 수 있기를.

‘초록아, 그때까지 난 널 몇 번이고 되돌아볼 거야. 내가 계속 널 떠올리고 기억하는 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아.’



다음 날 아침 7시. 초록의 방에서 자고 있던 해음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건조 경보를 알리는 안전 문자였다. 해음은 개의치 않고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한 시간쯤 뒤, 코끝을 자극하는 매캐한 냄새에 해음은 서서히 눈을 떴다. 방문을 열자, 산 중턱에서 큰 불길과 함께 검은 연기가 하늘을 뚫을 듯 솟구치고 있었다.

란과 미래, 현재는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 쪽으로 산책을 나간 듯했다. 해음은 다급히 란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곧 란의 방 안에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람은 거세지고, 불길은 산 아래로 몸을 길게 뻗어갔다. 머지않아 초록이 있는 폐교까지 닿을 듯했다. 해음은 잠옷 위에 외투만 걸친 채 대문 밖을 뛰쳐나갔다.

해음은 겨우 숨을 몰아쉬며 초록에게 달려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온통 초록만을 향해 있었다.

‘제발…제발…….’

해음이 휘날리는 불씨와 연기를 뚫고 폐교 앞에 다다랐을 때, 산불이 이미 앞서 초록에게 도착해 있었다.

“초록아-!”

해음이 불길 속에 타들어 가는 초록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나아갔다. 이대로 떠나보내선 안 됐다. 초록은 죽어가던 자신을 알아봐 주고, 구원해 준 유일한 존재였다. 혹여 끝끝내 구할 수 없다면, 고통만이라도 함께해야 마땅했다.

해음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들어가 초록을 와락 껴안았다. 숨이 막히고 온몸이 녹아내릴 듯 뜨거웠다. 그래도 해음은 슬프지 않았다.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초록과 한날한시에 눈 감을 수 있음에 안도했다. 하늘 아래 초록과 자신의 끝을 같이 둘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로써 둘은 더 이상 상실의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오로지 둘에겐 잠깐의 육체적 아픔만이 남아 있었다.

해음이 통증의 벽을 넘어 점점 의식을 잃어가고 있을 때, 초록이 이제 막 돋아나고 있는 자신의 잎들을 해음의 몸 위로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그 나뭇잎들은 해음의 몸을 감싸기엔 한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초록은 계속해서 그 행위를 반복했다. 자신으로부터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는 순간까지.

불길은 멈추지 않고 두 사람을 자꾸만 삼켜갔다. 해음은 초록을 감싸던 두 팔을 놓고 힘없이 쓰러졌다. 뒤이어 초록의 몸통이 분리된 채 무겁게 추락했다. 둘은 함께 나란히 타오르는 잿빛 바닥에 누워 끝을 맞이했다. 둘의 육체는 끊임없이 타들어 검은 재로 변해갔다.

폐교와 그 주변의 모든 것들이 타버린 뒤, 하늘에서 3월의 마지막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참혹한 광경 속에서, 초록 아래 묻혀 있던 해음의 편지와 그림책만이 반쯤 타버린 모습으로 란을 맞이했다. 란은 둘의 마지막 흔적 앞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말할 수 없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 해음과 초록이었던 것을 그저 넋 놓고 바라보았다. 한참을 믿을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며 내려오는 비를 맞았다.

불어오는 비바람에 해음의 재와 초록의 재가 섞여 녹아들었다. 해음과 초록은 혼자가 아닌 둘이 되어 이번 생의 마지막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 아래, 아주 희미하게, 봄날의 새싹 하나가 세상과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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