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년 뒤, 그동안 해음은 익숙한 일상 속에 머물면서도,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편의점에서 근무하며, 그 외 시간은 그림책을 만드는 작업에 몰두했다.
2024년 성탄절. 오늘은 평소와 달리, 기차역 근처 카페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카페에선 외국 가수 sia(시아)의 snowman(스노우맨)이라는 크리스마스 팝송이 흘러나왔다.
울지 마요 스노우맨, 태양을 두려워하지 마요.
누가 달릴 다리가 없는 날 업고 데려가 줄까요.
다리가 없는 나를요.
울지 마요 스노우맨, 더 이상 눈물 흘리지 마요.
당신의 귀가 없어지면 누가 내 비밀을 들어줄까요.
당신의 귀가 사라지면 말이에요.
내가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요.
얼어붙어 죽음이 와도 난 스노우 부인이니까요.
사계절 내내 당신은 나의 집이에요.
그러니 자, 어서 가요.
해음은 노래를 들으며 붉은색 목도리를 어루만졌다. 목도리엔 더 이상 나무 향이 배어 있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박해음. 먼저 와 있었네.”
우주가 어느새 해음의 앞에 자리 잡았다. 정장을 입은 우주의 모습은 낯설지만 늠름해 보였다.
“오늘 크리스마스라고 점장님이 일찍 보내주셨어.”
“오, 그래? 점장님 건강하시지?”
“응, 그대로 셔. 넌 어때? 어디 아픈 곳은 없고?”
“이제 좀 적응해서 그나마 나아. 넌? 요즘 어떻게 지냈어?”
“음…나 곧 책 나와.”
해음이 다소 수줍은 얼굴로 컵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무슨 책인데?”
우주가 놀란 표정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냥…그림책.”
“박해음, 네가 작가의 꿈이 있는진 몰랐네. 어쨌든 축하한다. 책 나오면 한 권 줘야 해.”
“그래, 특별히 하사하마.”
“그런데 왜 갑자기 작가가 되기로 한 거야?”
“…누군가 그랬거든. 나라면 반드시 좋은 책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순간 해음의 두 눈에 씁쓸함과 그리움이 공존해 맴돌았다.
“혹시, 너 예전 남자 친구?”
우주의 물음에 해음은 그저 미소로 답했다.
“내가 진짜 이상해서 묻는 건데…그 남자 친구, 인간 아니지?”
“응.”
해음이 빤히 우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야, 나 진지해.”
우주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나도 진지해.”
해음은 1년 만에 초록의 정체를 고백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초록에게 있었던 일을 짧게 풀어놓았다.
“정말 우리 초등학교에 있던 그 나무가, 그 사람이었단 말이야?”
우주가 얼빠진 모습으로 해음에게 되물었다.
“처음엔 나도 믿기 어려웠어.”
해음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잔잔히 웃음 지었다.
“널 살릴 운명이었나 보다. 인간이 된 나무라니…….”
우주가 시선을 떨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해음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찬찬히 초록을 떠올렸다.
저녁 8시 무렵, 해음과 우주는 카페를 나와 어두워진 성탄절 거리를 함께 걸었다.
“너도 참 고집 세다. 밥 사준다니까.”
우주가 뾰로통한 얼굴로 해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괜찮아. 커피 사 줬으면 됐지 뭐.”
“하여간 틈을 안 줘.”
우주의 말에 해음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번지려는 찰나, 우주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 아빠. 곧 들어간다니까. 알았어, 집에서 봐. 끊을게.”
“부모님이셔?”
“어. 빨리 보고 싶다고 성화 셔.”
“어서 가봐.”
“데려다주고 갈게.”
“아니야. 혼자 걷는 게 편해. 빨리 가서 부모님이랑 좋은 시간 보내.”
“깜깜한데, 안 위험하겠어?”
“괜찮네요. 그럼 나중에 또 보자, 강우주.”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도착하면 연락하고.”
“알았어. 잘 가.”
“어, 잘 가라.”
해음과 우주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발걸음을 멈춘 우주가 몸을 돌려 해음을 향해 외쳤다.
“박해음!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지금의 난 없었을 거야! 그리고 그림책, 잘될 거야! 진심으로 응원할게!”
해음은 뒤돌아 밝게 웃으며 우주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주 또한 손을 크게 흔들며 해음과 끝인사를 나눴다.
하얀 숨결이 두 사람 사이로 번졌다가, 이내 겨울밤 속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