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되돌아간 후, 해음은 극단적인 공허에 몸을 떨었다. 초록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 살을 에는 바람을 타고, 나날이 새롭고 실감 나게 전해졌다.
초록이 떠난 지 이 주일이 되는 날. 해음은 겨우 정신을 다듬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엔 초록이 남겨놓은 민트 초코아이스크림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순간 서울역에서 처음 아이스크림을 맛보던 초록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이같이 천진난만했던 그때의 초록이, 잠시나마 해음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해음은 남은 아이스크림을 정리한 후, 초록의 방으로 향했다. 초록이 떠난 뒤 처음으로 방문을 열어 보았다. 방 안엔 아직 옅은 우드 향이 맴돌고 있었다. 해음은 초록이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에게 말해줄 것만 같았다. 우리가 헤어진 일은 모두 꿈이었다고. 이별 따윈 없이,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 줄 거라고.
한참 상상 속을 헤매다 의식을 다잡은 해음이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문득 책상 위, 낯선 진녹색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상자 안엔 처음 보는 시집과 ‘어린 왕자’ 그림책, 그리고 완성된 붉은색 목도리와 카드가 들어있었다. 해음은 제일 위에 놓인 카드를 집어 들고, 서툴게 적힌 카드 속 글귀를 읽어갔다.
남은 너의 겨울이 춥거나 외롭지 않길 바라.
언젠가 이 붉은 실타래가 우릴 다시 이어주길.
-언제나 널 믿고 사랑하는 초록이가-
해음이 나무 향이 베인 빨간색 목도리를 매만졌다. 이어 눈물로 적셔진 두 눈으로 시집과 그림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음은 잠시 숨을 고르고, 초록이 접어둔 시집 한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절벽 끝에서 다시 마주했던 그날 초록의 마음이 더 깊고 생생하게 와닿았다. 문장 하나하나에 그날 초록의 숨결이 전해지는 듯했다. 해음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 장면 속으로 다시금 돌아가, 초록을 외면하는 대신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죽어가던 날 발견해 줘서 고마워. 모든 걸 놓아버린 나에게, 사랑을 안겨줘서 고마워.
해음은 마지막으로 ‘어린 왕자’ 그림책을 펼친 다음 삐뚤게 밑줄 쳐진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해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이게 되었다.
둘이 헤어질 날이 다가오자 여우가 말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네 잘못이야. 나는 네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네가 길들여 주길 원했잖아.”
“그래 그랬어. 그런데 너는 자꾸 울려고 하잖아.”
“그래. 맞아. 길들여서 좋을 게 없어.”
어린 왕자의 말에 여우가 대답했다.
“아니야. 그래도 좋은 게 있어. 밀밭의 황금빛을 사랑하게 되었잖아.”
해음은 생각했다. 어린 왕자와 여우의 말처럼 헤어짐은 분명 슬픈 일이지만, 누군갈 길들이고 사랑했던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또 다른 의미가 되어 여전히 서로의 마음속에 존재할 거라고. 그리고 그 존재의 힘으로 이별을 극복하고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