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석별(3)

by 지수

어느덧 해가 지고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모두 산속 집에서 저녁을 마친 뒤, 초록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이후 란은 해음과 초록 둘만을 조용히 밖으로 내보냈다. 둘은 다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폐교로 함께 걸어갔다. 이윽고 초록이 돌아가야 할 자리에 다다랐을 때, 그쳤던 눈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또 눈이 오네.”

초록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응, 그러게…….”

해음도 초록을 따라 하늘을 마주 보며 답했다.

“…우리가 다시 보는 일은 없겠지?”

“아마, 그렇겠지.”

해음은 덤덤한 어조로 거짓을 말했다. 초록이 어떤 모습이든, 해음은 분명 다시 초록을 찾아올 것이었다.

“잘 지내.”

초록이 나직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응, 너도.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이곳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

해음이 간신히 눈물을 참아내며, 마지막 인사에 마음을 가득 담아 답했다. 해음은 뒤돌아 천천히 초록과 멀어져 갔다. 점점 더 눈발이 거세졌다. 해음은 그 속에서 숨죽여 눈물을 쏟아냈다. 초록은 작아지는 해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이건 올바른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주위의 나무들이 소란스레 잎사귀를 흔들었다. 그 소리에 초록은 감당하기 버거운 감정의 물결에 휩싸였다. 불안과 혼란이 한꺼번에 밀려들며, 머릿속을 찢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순식간에 세상이 거세게 흔들렸다.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초록은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초록의 머릿속은 끊임없이 시곗바늘을 되감았다. 마침내, 이곳에서의 첫 만남을 비롯해 해음과 함께한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 초록은 힘겹게 정신을 붙잡고, 눈 속의 해음에게 달려갔다.

내리는 눈과 눈물로 엉망이 된 해음이 익숙한 발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초록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다시 기억해 냈구나……. 오늘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해음은 달려오는 초록을 지켜보며 애써 미소 지었다.

“왜 왔어.”

해음이 자신 앞에 멈춰 선 초록에게 말했다.

“네가 인간이 된 날 보고 약속했잖아. 다 되돌려 놓을 거라고, 내 삶만큼은. 그런데 이건 원래 내 삶이 아냐.”

“초록아…….”

“해음이 네가 없는 삶은, 내 삶이 아냐. 네가 있어야 내 삶이 온전해. 그러니까, 이대로 끝나선 안 돼. 적어도 내가 널 잃고 돌아가선 안 된다고.”

“난 네가 날 기억하지 못한 채 되돌아갔으면 했어. 그래서…아무 일 없듯, 아무렇지 않게 네 삶을 되찾길 바랐어.”

“그건 내가 바라는 삶이 아냐. 난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든 널 떠올리고 싶었어. 비록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고 해도, 그래서 더는 너에게 닿을 수 없다 해도.”

“미안해…정말 미안해, 초록아…….”

순간 해음의 눈물이 왈칵 터졌다. 초록은 진눈깨비로 변한 눈 속에서 펑펑 울고 있는 해음을 따뜻이 안아주었다.

“어쩌면 널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도…자주 찾아와 줘. 내 자리에서 항상 널 기다리고 있을게.”

“응…꼭 그럴게. 그리고 혹시 다음이 있다면, 그땐 내가 먼저 널 알아볼게. 네가 날 알아봐 주었던 것처럼.”

초록은 해음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초승달에 비친 해음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음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해음아.’

‘사랑해, 초록아…’

둘은 서로를 잃지 않으려 차가운 손을 꼭 맞잡았다. 부디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리길 바랐다.

그러나 무심히 흐르는 시간은 이윽고 자정을 가리켰다. 점차 초록의 몸이 눈부시게 빛나는 초록색 재가 되어 눈과 함께 허공에 흩어졌다. 이내 텅 빈 초록의 자리가 차츰 초록빛 재로 채워지고 온전한 느티나무의 형태를 되찾았다.

해음은 넋이 나간 채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나무가 된 초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초록에게 기대어 단단하고 거친 껍질을 쓰다듬었다. 멈췄던 해음의 눈물이 다시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점점 통곡으로 변해갔다.

그날, 얼어붙은 하얀 밤 속에서, 해음은 한참 동안 초록의 곁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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