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석별(2)

by 지수

초록의 기억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채워지고 비워지는 과정을 반복했다. 12월의 첫날, 아스라한 기억이 다시금 차츰 되살아났다. 초록은 마루에 앉아 조용히 미래와 현재를 바라보던 해음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꼭 잡았다. 해음은 그제야 초록에게 시선을 돌려 밝게 미소 지었다.

‘해음아. 우리가 함께 보는 겨울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그래서…더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나도 그래, 초록아. 너랑 같이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하얀 겨울을 보내고 싶어.’

둘은 말없이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아득한 산마루엔 새하얀 눈이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

“곧 여기도 첫눈이 내릴 텐데…….”

“응…초록이 네가 돌아가기 전까지 꼭 같이 첫눈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첫눈 오는 곳으로, 우리가 찾아갈까?”

초록의 제안에 해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초록이 넌 이곳에서 모두랑 남은 시간을 보내야지.”

“…….”

침묵이 스며들려는 찰나, 해음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박해음! 나 드디어 취직했다. 꼭 너한테 처음으로 알려주고 싶었어. 해송마을 가게 되면 내가 밥 살게. 그때까지 남자 친구랑 잘 지내고 있어라.

해음은 기쁜 마음으로 초록에게 우주의 합격 소식을 전했다.

“결국 해냈네. 정말 잘됐다. 해음이 넌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 있어?”

“음…글쎄…….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너 혹시 ‘어린 왕자’라는 그림책 기억나?”

“어린 왕자? 응, 기억하지.”

“너 어릴 때, 나한테 그 책 읽어줬었는데.”

“내가 그랬어?”

“어. 그때 너 정말 행복해 보였어. 그 책 읽으면서 ‘나도 멋진 그림책 작가가 될 거야!’라고 말했었거든.”

“순수하게 용감했네.”

해음이 살며시 웃음을 터트렸다.

“해음이 너라면 반드시 좋은 책을 쓸 수 있을 거야. 힘든 존재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따뜻하고 강한 마음을 지녔잖아.”

초록의 말을 들은 해음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해음이 너, 내 꽃말이 뭔 줄 알아?”

갑작스러운 질문에 해음이 두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초록을 바라보았다.

“운명. 너에게 길든 그 순간부터, 개화하는 매봄마다 내 꽃은 내 운명인 널 향해 피었어. 넌 그렇게 한 생명을 꽃피울 수 있는 존재야. 그러니까 부디, 너 자신을 더 아껴주고 사랑해 줘. 내가 널 그렇게 여기는 것처럼.”

해음이 잠시 멍하니 초록을 응시하다 두 팔 가득 초록을 껴안았다.

“고마워, 초록아. 정말 고마워…….”

초록은 해음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다시 흐릿해져 가는 기억 속에서 해음을 향해 말했다.

‘해음아. 넌 내 계절이었어. 난 그런 네가 어떤 일이든 충분히 잘 해낼 거라 믿어. 내가 널 떠올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도.’



2023년 12월 5일, 100일의 마지막 날. 산속 집의 모든 식구와 우진은 초록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 앞에 서 있었다. 미래와 현재는 자유롭게 모래사장을 뛰어다녔고, 란과 우진은 함께 해란초가 져 있는 모래언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음은 그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바다를 응시하는 초록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문득 초록의 암녹색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여전히 초록의 두 눈엔 아무런 감정이 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초록은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해음을 향해 성큼 다가왔다.

“왜 그렇게 봐?”

초록이 무심히 해음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

해음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초록을 올려다보았다.

“너 나 볼 때마다 꼭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쳐다보잖아.”

“내가? 아, 아니야. 네가 착각한 거겠지.”

해음이 황급히 고개를 내리며 시선을 피했다. 초록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이상하게…요즘 꿈을 꿀 때마다 누군가 날 ‘초록아’하며 부르는 소리가 들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왠지, 너의 목소리와 닮은 것 같아.”

“…세상에 비슷한 목소리는 많아.”

해음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초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초록이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않길 바라면서.

“혹시…내가 잊어버린 게 너야?”

초록이 해음의 까만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해음은 얼어붙은 얼굴로 한참 동안 초록을 응시했다. 그때, 둘 사이의 공백을 메우듯 갑작스레 하늘에서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둘은 고요히 내리는 첫눈 속에 서 있었다. 해음은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초록과 함께 맞는 처음이자 마지막 첫눈에 밝게 미소 지었다. 해음에게 지금 내리는 첫눈은 하늘이 나지막이 건네는 마지막 이별 선물과도 같았다.

“눈이다-!”

우진이 기뻐하며 자신의 손바닥 위로 눈송이를 담았다. 이어 미래와 현재가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눈 내리는 하늘을 향해 짖어댔다. 새하얀 눈이 점점 쌓이고, 초록빛 바다를 제외한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갔다. 해음의 머리 위에도 작고 큰 눈송이들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초록은 문득 그 모습을 지켜보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해음의 머리 위를 가렸다. 어느 봄날, 어린 해음에게 그늘을 만들어주었던 것처럼.

해음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눈 내리는 날의 초록을 바라보았다. 겨울 속 초록에게 예쁜 눈꽃이 피어나 있었다. 해음은 다시 마주하지 못할 그 모습을 자신의 두 눈에 가득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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