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석별(1)

by 지수

시간은 흘러 11월의 끝으로 접어들었다. 보름달이 뜬 날 밤, 해음은 초록이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외딴 수풀을 향해 홀로 과감히 걸어 들어갔다. 그때와 달리 공기는 한층 더 차가웠고, 날카로운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해음은 묵묵히 그 혼돈의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초록과 함께했던 순간만은 잃지 않기 위해서.

그 무렵 초록은 자신의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란에게 듣은 바, 돌아갈 시간이 2주도 채 남지 않았다. 이상하게 초록은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한없이 저려오곤 했다. 분명 이런 낯설고도 묘한 서글픈 감정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안도의 감정을 느껴야 마땅했다. 납득할 수 없는 아득한 기분 속에서, 초록은 문득 책상 아래 놓인 진녹색 상자 하나를 발견하였다. 상자 안엔 시집과 그림책,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붉은색 목도리가 실뭉치 곁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초록은 가만히 그 물건들을 바라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시집을 집어 들었다. 표지엔 ‘나무는 간다’라는 제목이 적혀있었고, 시집의 여러 페이지 중 한 페이지가 눈에 띄게 접혀있었다. 초록은 재빨리 그 페이지를 펼쳐 그곳에 적힌 시를 읽어 나갔다.


사랑의 발명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점점 초록의 흑록색 눈동자가 투명한 물로 채워져 갔다. 뒤이어, 잃어버렸던 기억이 불완전하게나마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늦여름 날 비바람 속의 어두운 절벽, 그 절벽 위에 주저앉아 혼자 세상을 등진 채 울고 있던 여자……. 초록의 머릿속은 시간을 거슬러 인간의 모습으로 해음과 재회했던 순간을 강렬히 떠올렸다. 초록은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다급히 방을 뛰쳐나왔다. 해음이 있는 곳으로, 그 어딘가로 지금 당장 달려가야만 했다.



그 시각, 해음은 마침내 수풀 한가운데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더는 반딧불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무와 풀, 그리고 푸른 보름달만이 해음과 같이 숨 쉬고 있었다. 해음은 다시금 주저앉을 듯 무너졌다.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그제야 함부로 터져 나왔다.

마땅히 감내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헛된 기대와 욕심이 해음의 마음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초록과 함께했던 모든 시간이 무한할 수 없을까. 그 모든 순간이 허락될 수 없을까.

해음은 절벽 위에서 초록과 재회한 그날처럼, 아이같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은 아이를 기다려 주지 않고 계속 흘러만 갔다. 영원 따윈 없이, 끝은 해음을 향해 조용히 다가왔다. 선명한 시간의 그림자가 마음 깊은 곳에 드리워졌다.

한참 눈물이 쏟아지고 마음이 가라앉던 그때, 누군가 뒤에서 해음을 가득 껴안았다.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익숙한 나무 향과 온기가 온통 해음을 감쌌다. 그 존재의 주인이 누구인지, 해음은 단숨에 알아챌 수 있었다. 초록의 기억이 돌아왔음을 직감한 해음이 초록의 팔을 풀고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초록아, 너…다 기억 난 거야?”

초록은 해음의 눈물을 닦아주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초록의 기억이 어떤 모습이든, 해음은 자신을 떠올려낸 초록이 두려웠다. 자기만큼 슬퍼질까 봐 무서웠다.

“해음아…난 널 계속 읽고 떠올리고 싶은데…자꾸만 너에 대한 페이지들이 하얗게 지워져 가…….”

초록의 얼굴은 금세 울 것 같았다. 말을 건네는 이 순간조차, 머릿속에선 자꾸만 해음에 대한 기억이 세어져 나갔다. 초록은 이런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해음이 두려웠다. 자기만큼 아파질까 봐 겁이 났다.

초록은 적어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전까지, 해음의 곁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함께 하고 싶었다. 자신이 떠나고 남겨질 해음이 자신에 대한 좋은 기억만 간직한 채 남은 생을 살아가길 바랐다. 그래서 더 이상 상실의 아픔으로 무너지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행여 다시 무너지는 순간이 온다 할지라도, 그 이유가 부디 자신만은 아니길 바랐다.

“초록아. 네가 날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기다려줬듯이, 나도 이 자리에서 계속 널 바라보고 서 있을 거야. 그러니까 언제든 마음껏 네 시간을 여행하고 돌아와도 괜찮아. 내가 늘 널 기억하고 있을게.”

해음이 천천히 손을 들어 초록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이, 사라져 가는 무언가의 마지막 온기처럼 또렷했다.

초록은 힘겹게 눈물을 삼키며 반짝이는 두 눈으로 해음을 내려다보았다.

“우리…아무도 볼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버릴까?”

초록의 말에 해음이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진짜 도망가볼까?”

해음의 말에 초록 또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초록아 난, 우리에게 어떤 순간이 온다 해도 끝까지 함께 견뎌내고 싶어.”

해음이 다운 대답에, 초록은 애정 어린 손길로 바람에 흩날리는 해음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어떤 순간에 놓여 있던 해음이 넌, 여전히 내가 살아 숨 쉬는 이유일 거야. 앞으로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해도, 부디 오랫동안 행복해 줘.”

해음은 초록을 향해 애써 웃어 보이며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운 수풀 속, 초록은 다시 한번 해음을 포근히 껴안았다. 문득 나뭇잎들이 연이어 사락거리며 고요한 왈츠처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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