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우주인(完)

by 지수

해음과 란이 잠시 초록의 방을 비운 사이, 우주가 홀로 초록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리고…미안해요. 어서 빨리 일어나요. 그쪽 보통 인간이 아니잖아요. 모두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깨어나요.”

우주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초록을 위해 기도했다. 부디 이번엔 자신이 초록을 구원해 줄 수 있길 바라며.

미처 의식하지 못한 눈물이 우주의 눈가에 가득 고이고, 이어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초록의 손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초록과 우주의 손가락 사이에 붉은 실이 이어지고, 초록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록은 어두운 무의식의 터널을 벗어나 점점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봐요! 정신이 들어요?!”

우주가 다짜고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초록은 그런 우주를 바라보며 관성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그리고 왜 갑자기 인간으로…….”

초록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기억 안 나요? 나 구한 그날, 갑자기 쓰러졌다면서요.”

“그날…?”

초록은 그저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초록에겐 모든 것이 꿈속 장난같이 느껴졌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주는 초록의 혼란스러움을 뒤로한 채, 기쁘고 벅찬 마음으로 방문을 나섰다.

“박해음-! 남자 친구 깨어났어-! 살아났다고-!!”



이후, 란이 계속해서 초록을 살펴보며 물었다.

“너 정말 기억 안 나?”

“몇 번을 말해. 너 밖에 기억 안 난다니까.”

해음은 뜻밖의 전개에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초록이 다시 깨어나 준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더구나 초록이 더 이상 소멸의 위험을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해음에겐 초록이 자신을 기억해 주는 것보다 초록의 안위가 훨씬 더 소중했다.

해음은 초록을 바라보며 가만히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문득 해음과 눈이 마주친 초록은 잠시 무미건조한 얼굴로 낯익은 해음의 두 눈을 들여다보다, 서서히 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해음의 얼굴에서 무언가 익숙한 감정이 어렴풋이 일렁였지만, 그 감정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 자신을 울렸던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내가 왜 사람이 된 거야?”

초록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모두가 괜스레 딴 곳을 응시하였다. 누구도 답해주지 않았다. 네가 사람이 된 건, 누군가를 위한 너의 간절한 바람이 기적처럼 닿았기 때문이라고.

잠시 후, 우주가 해음을 쳐다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기, 박해음. 네 남자 친구,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야? 좀 심각해 보이는데.”

해음이 곧장 우주를 째려보며 우주의 손등을 꼬집었다.

“야! 아파!”

“아프라고 한 거야. 제발 입 좀 다물고 있어.”

해음의 말에 우주가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초록은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왠지 모르게 몹시 언짢은 기분을 느꼈다.

“곧 나무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너한텐 더 잘된 일일지도 몰라.”

란이 심란한 얼굴의 초록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을 건넸다. 해음 또한 란의 말처럼, 초록이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채 100일을 맞이하는 것이 어쩌면 더 행복한 결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롯이 해음 자신만이 둘만의 기억을 간직한 채 이 이야기의 끝을 감당하면 될 일이었다. 이별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에 초록이 어떠한 슬픔도, 미련도 느끼지 않도록.



기억이 지워진 초록은 더 이상 해음을 향해 미소 짓지 않았다. 해음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대화를 나누는 일은 더욱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혼자 책을 읽거나 산속을 거닐며 자신만의 시간을 보냈다. 해음은 다소 거리를 유지한 채, 물끄러미 초록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햇살 아래 선 초록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이제 그 빛은 해음에게 닿지 않았다. 가을의 끝에서, 이전과 다른 초록의 모습과 마주하며 해음의 마음에 계절보다 먼저 겨울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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