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우주인(5)

by 지수

저녁 아홉 시경. 우주의 몫까지 연장근무를 뛴 해음이 녹초가 된 몸으로 산속 집에 도착했다. 초록이 지어준 빨간 털옷을 입은 미래와 현재가 해음에게 달려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해음은 미래와 현재를 번갈아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벌써 다섯 번째 연락이었다. 결과는 역시나 부재중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때, 갑작스레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만나서 반가웠다, 박해음. 잘 지내.

극단적인 불안감이 순식간에 해음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해음은 몇 번이고 반복해 글귀를 바라보다가 다급히 방문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초록아, 란아-! 나 좀 도와줘-!”



초록은 서둘러 나무들을 통해 우주의 위치를 알아보았다. 나무들의 대답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기차역 또는 바다. 나무들과 우주와의 접촉이 별로 없었기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난 기차역으로 갈게. 너희 둘은 바다로 가.”

란이 재빨리 몸을 돌려 역 쪽으로 달려갔다. 해음과 초록 또한 곧장 바다를 향해 뛰어갔다. 부디, 지금의 걸음이 늦지 않기를 바라며.


“강우주-!”

바닷가 입구에 다다랐을 때, 해음이 어둡게 잠든 바다를 깨울 듯한 목소리로 우주의 이름을 외쳤다. 해음과 초록은 검게 물든 모래사장을 헤치며 애타게 우주를 찾아 헤맸다. 이윽고, 차가운 바닷물에 몸이 절반 넘게 잠긴 우주를 발견하였다. 해음은 신발을 벗어던지고 거침없이 우주가 있는 바다로 달려갔다. 초록은 그런 해음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갈게. 넌 여기 있어.”

해음의 눈에 비친 초록은 사뭇 진지하면서도 어딘가 화가 나 있었다.

“너 수영할 줄 알아?”

“…괜찮을 거야. 난 인간이 아니잖아.”

문득 초록에게서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이 베어져 나왔다. 두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무거운 결의가 엇갈려 빛났다. 초록은 인간이 아닌 자신의 존재, 그리고 어쩌면 다가올 마지막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었다.

“초록아, 안 돼. 너까지 위험하게 할 순 없어.”

“그러는 넌? 바다에서 헤엄칠 수 있어? 너 자신부터 생각하고 이렇게 행동하는 거야?”

“살려야 하니까. 어떻게든 살려야 하니까.”

해음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초록은 낯선 얼굴로 해음을 내려다보다, 바다와 우주가 있는 곳으로 성큼 다가갔다. 어느새 우주는 턱 끝까지 바다에 잠겨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해음은 초조한 마음으로 다시 우주를 향해 나아갔다.

“오지 마. 여기서 더 움직이면 정말 화낼 거야.”

초록의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에 해음은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이어, 초록의 뒷모습을 응시한 채 깊은 고민에 잠겼다.

‘초록아, 이대로 널 보내도 괜찮은 걸까…….’

그 사이, 초록은 결심한 듯 담담히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다는 곤히 자던 잠을 억지로 깬 것처럼 거세게 물결을 일으켰다. 우주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지구에 대한 탐험을 포기한 우주는 자신의 숨을 앗아가는 물길 속에서 힘겹게 발버둥 치지 않았다. 이미 우주의 몸과 마음은 기꺼이 소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차디찬 암흑 속으로 가라앉고 있던 우주를 향해 초록이 온 힘을 내어 찾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아직은 이렇게 사라져선 안 될 존재니까. 초록은 거센 파도에 저항하며 힘차게 우주에게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의식을 잃어가던 우주를 만나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반면, 초록의 몸은 점점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숨이 막히고,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끝없는 물속에 작은 잎 하나가 내려앉듯,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한층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 해음은 가슴이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초록과 우주를 기다렸다. 어릴 적 아빠를 삼켜버렸던 저 깊고 검은 바다가 초록과 우주마저 데려가 버릴까 봐 미친 듯이 두려웠다. 그리고 이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없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불안과 무력 사이에서 고뇌하던 해음이 이내 바다로 몸을 던지려던 찰나, 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란은 서둘러 해음의 옆으로 다가와 상황을 살펴보더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멍청이가 지금 바다에 뛰어든 거야?”

“내가 간다고 했는데…”

“너 지금, 쟤가 뭔 짓을 한 줄 알아?”

“어…?”

“살아있는 나무가 바다에 잠기면 어떻게 될 것 같아?”

해음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바다는 나무를 품을 수 없다. 나무는 바다 아래서 뿌리내릴 수 없다.

란은 두 눈동자를 붉게 물들인 채 칠흑 같은 바다의 경계로 다가섰다. 란이 계속해 초록과 우주가 있는 곳을 응시하자, 바닷물에 잠겨가던 초록과 간신히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우주가 서서히 모래사장 쪽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둘은 사납게 몰아치던 바다에서 벗어나 잔잔한 모래 위로 조금씩 발을 내디뎠다.

“너 미쳤어?! 나무가 바다에 들어가면 어떡해!”

란이 흠뻑 젖은 초록을 향해 소리쳤다.

“그만해. 귀 울려.”

초록이 힘없이 모래 위에 주저앉으며 답했다.

“왜 이렇게 무모하게 굴어! 소멸당하기도 전에 죽고 싶어?!”

“괜찮아, 아직은.”

초록이 란을 안심시키듯 옅게 미소 지었다. 해음은 초록의 곁에서 한껏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초록을 바라보았다.

“초록아…너 정말 괜찮은 거지?”

초록은 아무 말 없이 해음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명과 현기증 속에서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우주는 그 옆에서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야, 강우주! 넌…!”

해음이 말을 잇기도 전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곧 경찰차가 도착했고, 경찰과 중년의 남녀가 빠른 속도로 뛰어왔다. 중년의 남녀는 여전히 정신을 다잡지 못하는 우주를 꼭 안아주었다. 중년의 남자가 가까스로 울음을 참아내며 힘겹게 우주에게 말을 건넸다.

“야 이 녀석아! 우리가 편지보고 얼마나 놀란 지 알아! 네가 뭐가 모자라서 이런 선택을 해. 우리 눈엔 세상에서 부족한 거 하나 없는 놈인데. 그깟 취직 좀 못하고 있으면 어떠냐. 아빠, 엄마가 될 때까지 옆에서 도와주면 되지. 실패해도 괜찮다, 우주야. 아빠, 엄마 믿고 얼마든지 실패해. 네가 어떤 상황에 있든 우린 항상 네 편이야.”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따뜻하고 진심 어린 목소리에, 우주는 굳게 얼어붙은 의식을 되찾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줄 부모님의 품 안에서.

해음은 조용히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며 안도와 부러움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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