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우주인(4)

by 지수

“너답지 않게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어.”

란이 심드렁한 얼굴로 뜨개질을 하고 있던 초록에게 말을 건넸다.

“몰라. 그냥 마음이 그래.”

초록의 대답에 란이 씩 웃어 보였다.

“뭐지? 그 기분 나쁜 웃음은?”

“멍청아, 너 이제 진짜 사람 되나 보다.”

“그게 무슨…”

“초록아-!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사 왔어!”

돌연 해음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더니 밝게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초록은 아무 저항 없이 해맑게 미소 지었다.


“이제부턴 그렇게 마시지 마. 알았지?”

초록이 마루에 앉아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해음에게 말했다.

“알았어. 앞으로 조심할게.”

“그런데 그 남자는 누구야?”

“강우주? 초등학교 동창.”

“내가 있던 해송초등학교?”

“응. 편의점에 이력서 내러 갔다가 우연히 만났어. 우주가 너한테 고맙대. 어제 자기 챙겨줘서.”

“맘에 안 들어.”

초록이 아이스크림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인상을 굳혔다. 해음이 무심코 전한 말이 마음 어딘가를 툭 건드린 것 같았다.

“뭐가 맘에 안 드는데?”

“그 남자 사람.”

“왜? 어제 걔가 뭐라 그랬어?”

“그냥. 그냥 다 맘에 안 들어.”

초록이 갑자기 반이 넘게 남은 아이스크림 통을 들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아직 화가 덜 풀렸나?”

초록의 마음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해음이 홀로 마루에 남아 낮게 중얼거렸다. 그때, 외투 주머니 속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해음은 주머니를 뒤적이다 폰을 꺼냈다. 발신인은 우주였다.

-편의점의 세계로 온 걸 환영한다.

해음의 입가에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미소가 천천히 번졌다.



어느새 해송 마을에 완연한 가을이 잦아들었다. 해음은 계절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일상에 조금씩 적응해 갔다. 그러나 초록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편이 싸늘해졌다. 초록과의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자꾸만 또렷이 피부에 와닿았다. 그럴수록, 초록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만히 해음의 숨을 조여왔다.

2023년 11월 5일. 해음은 오늘도 깊은 고민 속에 빠져들었다.

‘어떡하지…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어.’

“해음 이모!”

문득 카운터 너머로 익숙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해음에게 들려왔다.

“어, 우진아-! 너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 아냐?”

“오늘 오후에 엄마랑 서울 갈 일 있어서 조퇴했어요. 그전에 기차 안에서 먹을 간식 좀 사 가려고요.”

“그렇구나. 이모가 사줄게.”

“아니에요, 엄마가 용돈 많이 주셨어요. 최근에 출판사랑 계약하셨거든요.”

“정말? 잘됐다! 어머니 책 나오시면 이모도 사서 읽어봐야겠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모 뒤에 일하는 삼촌, 혹시 요즘 무슨 일 있어요?”

“글쎄…별말 못 들었는데. 왜?”

“평소랑 달리 자주 멍 때리고 계시던데요.”

“그래? 이따 교대할 때 한 번 물어봐야겠네.”

해음이 왠지 모를 찜찜한 기분을 느끼며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였다. 우주가 오기까지 약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무렵, 우주는 연이어 불합격 통보를 받은 후 텅 빈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거절은 아무리 반복되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시끄러운 공사 소리, 분주한 사람들의 움직임. 그 모든 소란의 바깥에서, 우주는 어두운 방 안에 홀로 누워 생각했다. 끝내 지구에 도달할 수 없다면 소멸을 택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어떤 곳에도 닿지 못한 채 이곳에 계속 머무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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