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음과 우주는 어젯밤 만취되었던 테이블에 다시 앉아 퀭한 얼굴로 숙취해소음료를 들이켰다.
“탁-.”
우주가 빈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죽겠다.”
“나도. 오랜만에 과음했더니 돌아가시겠어.”
“그런데 너, 아까 그 집에서 지내는 거야?”
“응.”
“그 집, 우리 어렸을 때 귀신 나온다고 소문났던 집 아니야?”
“다 만들어진 소문일 뿐이야.”
“그럼 그 사람들은 뭐야? 범상치 않아 보이던데……. 특히 그 여자아이는, 기운이…어휴.”
우주가 자신을 쳐다보던 란의 표정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제대로 봤네.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있어. 그게 너 신상에 좋을 거야.”
“어린 무속인…뭐, 그런 건가? 그럼 나 잘못하면 걔한테 살 맞는 거야?”
“어. 함부로 입 잘 못 놀렸다간 다신 말 못 하고 살 수도 있어.”
우주는 해음이 하는 말이 장난인지, 진담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농담이고, 둘 다 우리처럼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화도 내줄 아는 그런 평범한 존재들이야.”
“그런데 그 남자, 너 좋아하지?”
우주가 갑작스레 해음에게 물었다.
“좋, 좋아하겠지? 친구로서…?”
해음이 다소 빨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뭐지, 이 수상한 반응은. 그 남잔 널 이성으로 좋아하는 것 같던데.”
우주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해음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아주 친한 친구 사이라고, 친구!”
해음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지나가던 사람 몇몇이 해음과 우주를 힐끗 쳐다보았다.
“알았으니까 목소리 좀 낮춰. 너 때문에 다 쳐다보잖아. 안 그래도 둘 다 지금 엉망인데.”
“네가 괜한 소릴 하니까 그렇지! 그건 그렇고, 혹시 너 주위에 도움 필요한 사람 없어?”
“도움 필요한 사람?”
“응.”
해음이 초록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시간은 한 달 반 정도뿐이었다. 서둘러 다음 연을 맺지 않으면 초록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있지. 그것도 아주 가까이.”
“그게 누군데?”
“나.”
“야, 강우주. 나 지금 진지하다고.”
“그러니까. 나라고.”
우주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해음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해음 또한 서서히 표정이 가라앉았다. 해음은 취업을 준비한다는 것이 얼마나 한 사람을 불안과 좌절 속으로 몰아넣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선, 끊임없이 모자라게 비치는 자신과 싸워나가며 끝까지 자신을 믿어야만 했다.
해음은 무거운 마음으로 우주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냐. 말한 사람 괜히 무안하게. 나 아직 견딜 만해.”
우주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힘들면 말해. 혼자서 앓지 말고.”
“그래, 말만이라도 고맙다. 난 빨리 집에 가서 씻고 다시 출근해야겠다. 천천히 마저 마시고 가라.”
“피곤하겠다, 너.”
“아직 젊으니까 괜찮아. 청춘이잖냐. 아! 그 멀대 같은 네 남자 친구한테 어제 고마웠다고 전해줘. 그럼 간다!”
“남자 친구 아니라니까-!”
우주가 뒷모습을 보인 채 앞으로 걸어가며, 해음이 있는 쪽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해음의 눈에 비친 우주의 뒷모습은 오늘따라 사뭇 지치고 버거워 보였다. 더 이상 꿈 많고 용기 있던 어린 시절의 돈키호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해음의 마음을 조용히, 그리고 씁쓸히 가라앉혔다.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선 우주는 익숙한 적막함을 느꼈다. 직장에 나가 계신 부모님을 대신해 쓸모없는 자신만이, 우주와 같은 집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주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양치를 하며 생각했다. 언제쯤 이탈한 궤도에서 벗어나 정상 궤도로 들어설 수 있을까. 언제쯤, 이 어둡고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벗어나 지구에 착륙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우주의 핸드폰으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문자를 확인하던 우주는 힘없이 폰을 내려놓았다. 2차 면접 불합격 통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