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초록은 피가 모두 빠져나간 듯한 창백한 얼굴로 산길을 올랐다. 점점 땅이 아득하게 흔들리고, 들려오던 바람 소리조차 멀어져 갔다. 겨우 산속 집에 다다랐을 때, 눈앞이 서서히 검게 물들며 이내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 후, 사흘이 지나도록 초록은 눈을 뜨지 못했다. 방 안의 옅어진 나무 향만이 초록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언제쯤 깨어날 수 있을까?”
해음은 초췌한 얼굴로, 늦가을 시든 잎처럼 색을 잃은 초록을 바라보았다.
“본질이 나무이기 때문에 다른 자연이 지닌 속성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어. 어쩌면…….”
란이 하려던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초록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잠시 뒤, 힘겹게 입술을 떼며 나직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쩌면, 소멸하기 전까지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리고…의식을 되찾는다고 해도, 우리가 알던 모습과 다를지도 몰라.”
곧 해음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해음은 싸늘해진 초록의 손을 꼭 잡은 채 또다시 자신을 책망하기 시작했다. 그날 바다에 빠져야 했던 건, 이런 모습으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건, 모두 자기 자신이어야 했다고.
어리석게도 해음은 초록이 바다에 잠기던 그 순간, 마음 한편에 옅은 희망을 피워내고 있었다. 이대로 초록이 우주를 구해낼 수 있다면, 마침내 세 번째 연이 완성되어 무사히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해음의 기대와 달리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박해음-. 집에 있어?”
불현듯 우주의 목소리가 방문 너머로 들려왔다. 해음은 파리한 모습으로 힘없이 마당에 서 있는 우주에게 다가갔다.
“이제 좀 괜찮아?”
해음이 간신히 우주의 얼굴을 살폈다.
“어, 많이 좋아졌어.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
우주가 부쩍 수척해진 해음을 걱정스레 응시하였다.
“초록이가…초록이가 많이 아파.”
해음이 애써 눈물을 참으며 답했다.
“…그때 나 구해준, 네 남자 친구? 안 그래도 부모님이 고맙다고 이것저것 만들어주셨는데…….”
우주가 보라색 쇼핑백에서 반찬통들을 꺼내 보였다. 해음은 아무 말 없이 우진의 부모님이 보내주신 정성 어린 선물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 그렇게 된 거…혹시 나 때문이야?”
우주가 한층 어두워진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야. 나 때문이야. 내가 그날 도와달라고 해서…….”
“야, 넌 무슨 그런 말을…….”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잠깐 앉을래?”
해음의 제안에 우주가 고개를 끄덕인 뒤 털썩 마루에 걸터앉았다.
“너 왜 얘기 안 했어. 힘들면 얘기하라니까.”
해음이 애써 우주를 향해 미소 지었다. 우주는 그제야 쌓아두었던 마음속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우주는 그 어느 때보다 사회가 주는 온기가 그리웠다. 하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사회가 정해놓은 경계선 밖으로 멀어지기만 했다. 사회와 자신과의 거리가 벌어질수록, 우주는 자신이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자신을 알아봐 주지 못하고 밀어내기만 하는 이 사회를 원망하고 탓했다. 자신의 밑바닥까지 긁어내며 여기서 이렇게 빛나고 있다고 그렇게나 소리쳤지만, 돌아온 것은 ‘그 정도 빛은 누구나 품고 있으며, 네가 가진 모든 걸 갉아 만든 그 빛은 아직 부족하고 아름답지 못하다’는 대답뿐이었다.
어느새 우주는 태양계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명왕성이 되어 버렸다. 모든 게 제대로 반짝이지 못한 자신 때문이었다. 더 완벽하게, 더 찬란히 빛났어야 했는데. 반복되는 사회의 거부와 냉대 속에 넝마가 되어갈 즈음, 원망의 화살이 오로지 자신만을 표적 삼아 날아오기 시작했다. 끝없이 추락한 자존감과 치솟은 자책감은 우주를 지구 끝으로 내몰았고, 이내 자신과 사회와의 싸움에서 백기를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백기의 결과로, 그날 우주는 차디찬 바닷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간의 심정이 담긴 우주의 이야기를 들은 해음은 자신만의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넸다.
“지금까지 정말 잘 버텨왔어, 강우주. 그런데 그거 알아? 네가 빚어낸 그 빛, 세상에 단 하나뿐인 빛이야. 네가 아닌 누구도 만들어낼 수 없어. 오로지 너만이 유일하게 빚어낼 수 있는 빛이야. 그러니까, 세상에 내보인 너의 빛에 자부심을 가져.
명왕성도 사람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태양계로 분리되었을 뿐, 과거부터 지금까지 자기만의 고유한 빛을 내고 있는 행성이야. 절대 부족해서 떨어진 게 아니라고.”
쌀쌀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해음의 말을 듣고 있던 우주의 두 눈에서 따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주는 자신의 마음속에 한 가지 믿음을 품기 시작했다. 끝없는 표류 끝에 방향을 잃어버린 우주인이 되었더라도, 자신을 놓지 않고 묵묵히 자신만의 궤도를 그려나간다면, 언젠가 반드시 소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