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프롤로그

by 지수

2023년 8월 27일, 여름의 끝자락.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며 계절의 경계를 흐려놓았다. 그 틈 사이로 창백한 얼굴의 해음이 서늘한 밤공기를 가르며 폐교로 들어섰다. 녹슨 그네와 색 바랜 교실, 텅 빈 운동장이 깊고 큰 두 눈동자에 고스란히 스몄다.

조금 더 안쪽, 느티나무 한 그루가 어둠 속에서 홀로 시간을 붙든 채 해음을 맞이했다. 해음은 옅게 미소 지으며 느티나무 앞에 다가섰다.

“안녕, 오랜만이야.”

해음은 스무 해 전 느티나무 곁에서 함께했던 어린 시절을 찬찬히 떠올렸다. 그러나, 순수하게 반짝이던 초록빛 과거는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현실을 더욱 어둡게 짓이겨 놓았다.

‘내가 다 망친 거야.’

불현듯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스쳐 지나가고, 온몸이 반사적으로 그 기억을 밀어냈다. 해음은 초점 없는 시선과 공허에 잠긴 얼굴로 자책의 늪 속에 더 깊이 잠겨 들었다. 그 순간, 해음의 목소리가 더 듣고 싶다는 듯 느티나무의 잎들이 밤바람을 타고 사락거렸다. 아주 잠시, 해음의 마음에 잔잔히 파문이 일렀다.

“이상하게 20년 전에도, 지금도 널 보고 있으면 숨 쉬는 듯한 느낌이 들어. 고마워,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어 줘서.”

해음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 느티나무의 거친 표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래된 나무껍질 너머로 은은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 온기에 잠깐 망설이던 해음은 이내 입술을 떼어 말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 잠시라도. 지금 모습 그대로 잘 지내.”

마지막 인사와 함께 흩날리던 나뭇잎들이 고요히 움직임을 멈췄다. 해음은 물끄러미 느티나무를 한 번 더 올려다본 뒤 서서히 발걸음을 떼어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를 조용히 반복해 되뇌었다.

‘이제는, 모든 걸 놓아줄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