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음은 자신의 최종 목적지인 폐교 뒤 위치한 산을 향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땅은 산으로 진입하기 전부터 꽤 미끄럽고 질퍽였다. 이따금 걸음을 주춤거리며, 해음은 홀로 더없이 깜깜한 밤을 오르고 또 올랐다.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그쳤던 비가 다시 흩뿌리기 시작했다. 해음은 문득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마지막과 무척이나 어울리는 날씨라고. 엄마가 세상 속에서 사라졌던 그 날처럼.
숨을 크게 한 번 고른 뒤, 남은 힘을 다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산 정상에 도착한 해음은 앞을 향해 더욱 발을 내디뎠다. 최종 목적지인 절벽 끝에 다다를 때까지.
절벽 아래, 바위에 부딪혀 치솟은 파도가 해음을 집어삼킬 듯 무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절벽 위에서 그 모습을 무감각하게 지켜보던 해음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왜 자신의 마지막이 이곳이어야 했는지. 도무지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순간 무엇에 홀린 듯, 그저 서울에서 이곳 해송마을까지 내려왔을 뿐이다.
‘아니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원인이 어떻든 전혀 상관없는 밤이었다. 곧 맞이하게 될 결과만이 중요했다.
해음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그동안 자신을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과거와 현재, 더이상 그려지지 않는 텅 빈 미래가 한꺼번에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해음은 핏기없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절벽 위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세상에 남겨진 마지막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해음의 얼굴은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과 더 굵어진 빗줄기로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때, 주변의 나뭇잎들이 온 힘을 다해 휘날리기 시작했다. 요동치는 나무들 속에서 큰 그림자 하나가 비를 가르며 해음을 향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곧 해음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존재의 온기와 숨소리, 말 없는 시선이 해음의 의식을 붙잡았다.
묘한 인기척에 천천히 두 손을 얼굴에서 내리던 해음은 순간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처음 보는 키 큰 낯선 남자가 이 시간, 이곳에서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음은 무섭고 당황한 마음에 입고 있던 얇은 긴 팔의 옷소매로 얼른 얼굴을 닦아낸 뒤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남자는 해음의 모습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지켜보다 조심스레 첫마디를 건넸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용건 없으시면 그냥 지나가시죠.”
해음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괜히 강하게 말을 내뱉었다.
“같이 내려가자.”
남자는 익숙한 나무향을 자아내며 해음에게 한 발 짝 더 다가갔다. 해음은 그런 남자의 태도에 서서히 언짢은 감정이 밀려들었다. 마치 예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듯 건네는 말과 행동이, 자신의 마지막 선택을 막아서는 모습이, 적잖이 심기를 건드렸다.
“아니, 아까부터 왜…”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내며 똑바로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을 때, 해음은 자기도 모르게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분명 오늘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다. 남자의 따뜻하고 차분한 흑갈색 머리와 맑고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해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은 절벽 위에서 그저 아무 말 없이 함께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흘러가는 밤의 장면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모습만 멈춰서 있었다.
“이대로 있을 거야?”
계속해서 내리는 빗속에 온몸이 다 젖어 들 무렵, 남자가 먼저 두 사람의 화면을 재생시켰다.
해음은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이어지는 남자의 한숨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싸늘한 공기를 메웠다. 다시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남자는 다소 목이 멘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 말을 이어갔다.
“이제야 널 만났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뜻을 짐작할 수 없는 말에 해음이 무의식적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흑록색 눈동자가 눈물로 가득 고여 흐린 달빛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상했다. 만나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눈물까지 보이다니.
“나 모르겠어?”
남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표정으로 해음을 내려다보았다. 해음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분명, 과거 어느 시점에서 마주했던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온 31년의 삶 속에서 이러한 외모를 지닌 사람을 결코 만난 적이 없었다.
“…….”
해음은 그저 가만히 남자를 응시했다. 곧이어 남자는 자신의 크고 기다란 손으로 해음의 차가운 손을 꼭 붙잡았다.
“비를 너무 많이 맞았어. 돌아가자.”
“이거 놔요!”
해음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 뒤 절벽 끝으로 뒷걸음질 쳤다.
“위험해, 해음아!”
남자는 팔을 뻗어 해음의 허리를 감싼 뒤 자신의 몸쪽으로 이끌었다.
“방금…해음이라고 했어요?”
해음이 놀라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내려가면 다 설명해줄게. 그러니까…제발 나랑 같이 가자.”
이런 건 해음의 계획 속에 없던 전개였다. 해음은 더이상 아등바등 살아내고 싶지 않았다. 기대되지도 않는 삶이 숨도 못 쉴 정도로 지치고 버겁기만 할 뿐이었다. 모든 내일을 절실히 끝내고 싶을 만큼.
“지금 나에겐, 이 선택만이 마지막으로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해음이 곧 남자의 팔 안에서 빠져나와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같이 있어 줄게.”
남자가 돌아선 해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힘주어 말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더이상 그런 생각 안 들게 옆에 있어 줄게. 그러니까 해음아. 살아줘. 살아서 나랑 같이 있어 줘. 딱 백일 동안만.”
이 남자는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살리려고 하는 걸까. 백일은 또 무슨 말일까.
남자의 말에 해음이 잠시 주저한 뒤 입술을 떼었다.
“내가 그쪽이랑 왜요? 제발 더이상 내 삶에 간섭하지 말고 가세요.”
해음이 말을 마치고 몸의 중심을 절벽 아래로 기울이려는 찰나, 남자가 해음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아직도 모르겠어?! 나, 초록이라고-!”
순간, 해음의 심장이 내려앉고 호흡이 멎었다. 멈춘 해음의 시간은 2002년, 초등학교 3학년 여름으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