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재회(2)

by 지수

2002년 8월 말, 오후 4시.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 속에서 해송초등학교 운동장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운동장 외곽 쪽에 자리한 느티나무는 시원하게 내려오는 소나기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아직 하교하지 않은 초등학생 무리가 느티나무 쪽으로 소란스레 몰려오기 시작했다.

“너희들 그거 알아? 비 오는 날엔 학교 느티나무가 사람처럼 살아 움직인대!”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하고 체격이 좋은 남자아이가 같은 무리의 아이들에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야, 그걸 믿냐? 어떻게 나무가 살아 움직여.”

양 갈래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핀잔을 주었다.

“진짜라고! 직접 본 사람도 있다고 했어!”

“어휴, 저 멍청이. 저러니까 애들이 만날 놀리지.”

“뭐?! 야, 정말로 움직이면 어떡할 건대!”

“그럼 내가 앞으로 너한테 평생 선생님이라고 부를게.”

“방금 한 말 꼭 지켜라!”

남자아이는 씩씩거리며 느티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느티나무를 손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야. 너 비 오는 날 움직일 수 있다며? 한 번 보여줘.”

느티나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남자아이는 느티나무를 주먹으로 마구 치기 시작했다. 이어 몇 번에 걸쳐 느티나무 아래를 발로 세차게 내리찍었다. 계속되는 타격에 느티나무의 잎들이 힘없이 축축한 진흙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엄마를 기다리던 해음이 우연히 이 모습을 지켜보다 느티나무 쪽으로 뽀로로 달려갔다. 그리고 자신보다 키와 덩치가 훨씬 큰 남자아이를 있는 힘껏 밀쳐냈다.

“하지마! 나무가 아파하잖아!”

“이 꼬맹이가! 너가 무슨 상관인데! 저리 비켜!”

남자아이는 느티나무를 가로막고 선 해음의 팔을 세게 밀었다. 그 힘에 해음은 물웅덩이에 그대로 나자빠졌다. 순식간에 해음이 아끼던 초록색 개구리 모양의 우비가 흙탕물로 더럽혀졌다.

“으아아앙-!”

해음은 입을 크게 벌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흙빛 눈물이 해음의 뺨을 타고 서럽게 흘러내렸다. 당황한 남자아이는 얼른 자신의 무리와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해음은 남자아이 무리가 떠난 뒤에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계속 소리 내 울어 댔다. 그러다 겨우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이 아팠지?”

해음이 느티나무를 그렁그렁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느티나무가 맞은 곳들을 자그마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아, 맞다!”

문득 무언갈 떠올린 해음이 자신의 우비 안에 메고 있던 가방을 꺼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해음의 초록색 가방이 점점 우비에 묻은 진흙과 쏟아지는 빗물로 젖어 들었다.

“찾았다-!”

해음이 해맑게 웃으며 강아지 캐릭터가 그려진 밴드를 꺼내 보였다.

“이러면 이제 안 아플 거야.”

순식간에 느티나무의 몸통이 해음이 덕지덕지 붙여놓은 밴드로 장식되었고, 해음은 그 모습을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 이름은 해음이야, 박해음. 바다 해에 소리 음. 우리 엄마한테 들었는데, 지금 저기 하늘나라에 계시는 아빠가 평소에 바닷소리 듣는 걸 엄청 좋아하셨대. 그래서 내 이름을 해음이라고 지으신 거래.”

해음이 재잘거리며 느티나무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느티나무는 그런 해음을 따스하게 맞이하듯 바람결도 없이 나뭇잎을 살랑살랑 움직여 보였다.

“너도 이름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해음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이내 조그만 입술을 떼며 느티나무를 향해 말했다.

“초록이 어때? 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초록색을 가졌으니까!”



“말도 안 돼…너가 그 초록이라고? 넌 나무인데 어떻게…그리고 아까까지도 넌…….”

해음이 벙찐 표정으로 초록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정말 미쳐버린 걸까 싶었다.

해음은 다시 한번 찬찬히 초록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친숙한 우디향, 짙은 갈색 머리카락, 암록색의 눈동자…익숙지 않지만 낯설지 않은 느낌. 모든 것들이 인간이 되어 버린 초록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말 너야?”

“응, 나야.”

초록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해음을 향해 차분히 미소 지었다. 마치 나뭇잎이 여름밤 바람에 일렁이듯.

곧 두 사람을 적셔오던 빗줄기가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어…….”

현실감 없는 눈앞의 모습에 혼란스러워진 해음은 초록을 바라보던 고개를 아래로 내려뜨렸다. 갑자기 강한 현기증이 일고 열이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시야가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해음아, 너 어디 아파?”

초록이 몸을 숙여 조심스레 해음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해음은 가슴이 답답해지고 귀가 멍해졌다.

“어? 아니, 괜찮아…….”

그 말을 끝으로 해음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의식을 잃었다. 초록은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도착한 해음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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