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재회(3)

by 지수

“짹짹짹짹-”

새가 한껏 지저귀는 소리에 해음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벗어나 눈을 떴다. 낯선 고즈넉한 분위기의 한옥 방안, 살짝 열린 방문 틈새로 쏟아져 오는 햇빛, 햇빛을 맞으며 마당의 꽃들을 응시하고 있는 초록의 모습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꿈인가…? 아니면, 천국인가…?’

폭신한 이불 속에 누워 있던 해음은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뒤이어 창가 옆의 자개 화장대가 있는 곳으로 엉거주춤 걸어갔다. 화장대 앞에 헝클어진 단발머리를 한 성인 여자가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해음은 계속 거울 속을 응시하며 자신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

‘뭐야! 꿈도, 천국도 아니라고?!’

뺨으로 전해져 온 통증이 머릿속 의문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 주었다. 하지만 온전한 대답을 가져다주진 못했다. 해음은 대충 머리를 정리하고서 서둘러 방문을 나섰다. 방문 옆 벽에 기대어 마루에 앉아있던 초록이 고개를 돌려 해음을 올려보았다.

“일어났어? 몸은 좀,”

“저기 말이야,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다급한 해음이 초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말을 밀어붙였다.

“응, 뭔데?”

해음은 쭈볏쭈볏 초록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나 혹시…어제 죽었어?”

“응?”

초록이 적잖이 어이없어하며 미간을 찌푸린 채 해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안고 내려왔는데…….’

“아니, 이상하잖아. 난 분명 어젯밤 절벽 위에 서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나무에서 사람으로 변해버린 네가 날 찾아왔고, 너랑 대화하던 중 난 의식을 잃었어. 그리고 지금,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웬 근현대사 책에 실릴 법한 이 한옥에서 일어났단 말이야.”

해음이 다소 빠른 속도로 종알거리며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그래서?”

초록은 그런 해음이 그저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해음은 심각한 자신과 달리 아무 생각 없이 마냥 즐거워 보이는 초록이 퍽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라니-! 넌 아닐지 몰라도 난 이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이승인지 저승인지 헷갈릴 정도로 무척 혼란스럽다고! 그러니까 이제 제대로 설명을 좀…”

열변을 토하는 해음의 이마에 불쑥 초록이의 긴 손가락이 잠시 부드럽게 올려졌다 내려왔다.

“열도 내리고 말도 예전처럼 재잘재잘 잘하는 거 보니까 다 나았나 보네. 다행이다.”

해음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할 말을 잃고 잠시 멍하니 초록을 바라보았다.

“뭐…뭐야, 너! 갑자기…!”

해음의 두 뺨이 마당에 핀 연지색 꽃처럼 물들여졌다.

“해음아.”

“어?”

“많이 힘들었어?”

“…….”

해음은 순간 울컥한 감정이 차올라 차마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만약 누군가 저토록 따스하게 자신의 위안을 물어봐 줬더라면, 어젯밤 그 절벽 위에 서 있는 일 따윈 없었을까.

해음은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 없이 초록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난 하루하루가 죽고 싶을 만큼, 아니 죽을 힘도 낼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고 버거웠다고. 자기를 둘러싼 세상이 자신에게만 온통 무채색이라 너무 외롭고 두려워서 그냥 다 놓아버리고 싶었다고. 그래서, 허공에 휘날리다 사라지는 아주 작은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세상에 흩어지고 싶었다고.

“…해음아. 우리가 어둡고 캄캄한 날을 지나서 이렇게 눈부신 날을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다 지나갈 거야. 네 마음속 깊은 밤도.”

초록의 말에 해음의 눈동자가 이른 봄날의 수면처럼 투명하게 차올랐다. 해음에겐 그저 이 순간이 꿈만 같이 느껴졌다. 결코 깨고 싶지 않은 현실 너머의 꿈.

“쾅-!”

갑작스레 옆방에서 초등학교 고학년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방문을 열고 마루로 걸어 나왔다.

“놀고들 있네.”

긴 검정 파마머리에 동그란 검정 눈동자, 백옥같이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아이는 빤히 해음과 초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해음 또한 여자아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같이 마주 보았다. 해음의 31년 인생동안 저토록 회의적인 눈빛은 처음이었다.

“혹시, 너 동생이야?”

해음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초록의 귀에 대고 물었다.

“그래 보여?”

초록이 옅은 실소를 터트렸다.

“기분 나쁘게 누굴 남매 취급해! 어젯밤에 내 방까지 빌려줬더니!”

여자아이가 분하다는 듯 소릴 바락 질러댔다.

“미안해, 난 그냥 잘 몰라서……. 어제 방 쓰게 해줘서 고마워. 초록아, 나 이제 그만 가볼게.”

“쟤 뭐라니. 네가 지금 누구 때문에 다 포기하고 사람이…읍, 읍-!”

초록은 순식간에 여자아이에게로 달려가 입을 막았다.

“일, 일단 먼저 씻고 나오는 게 어떨까?”

초록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 쪽으로 고갯짓해 보였다.

‘냄새나나?’

해음은 자신의 양팔을 살짝 들고서 킁킁거렸다.

‘딱히 안 나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씻고 떠나는 게 낫겠지.’

“잠시 화장실 좀 쓸게.”

“어어! 맘껏 써!”

해음이 화장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다음 초록은 여자아이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감히 산신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 죽고 싶어?”

여자아이가 초록을 쏘아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박란. 지금 해음이 앞에서 그런 얘길 꺼내면 어떡해. 안 그래도 많이 힘들어하는데.”

“웃기고 있네. 네가 지금 남 생각할 때야? 이제 어떡할 거야. 일이 틀어지면 넌 그냥 백일 뒤에 영영 소멸하는 거야. 이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실체도, 모두의 기억에서도 사라져 버릴 거라고!”

“그렇게 된다 해도 괜찮아.”

“하, 너 정말…고작 하루 남기고 신령 자리도 포기하더니,”

“그게 다 무슨 말이야?”

해음이 굳어버린 얼굴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해음아…”

“초록이 너, 백일 뒤면 없어지는 거야? 그럼 어제 절벽 위에서 백일만 같이 있자고 한 것도…….”

“…….”

초록은 아무 말 없이 슬픈 표정으로 해음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야?”

“꼭 그런 게 아니라…”

“어쨌든,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거잖아. 설마…나 때문은 아니지?”

해음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부정하듯 애원하는 얼굴로 초록에게 물었다.

“아니야. 모두 내가,”

“그래, 맞아.”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란이 초록의 말을 가로채며 해음의 질문에 답했다.

“야, 박란-!”

초록이 란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시끄러! 감히 누구한테 큰 소리야. 야, 거기 여자 사람. 딱 한 번 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어젯밤, 이 멍청이가 웬일로 산신인 나한테 사정하더라고. 제발 지금 사람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꼭 살릴 사람이 있다나 뭐라나……. 그런데 그게 아마, 여자 사람 너겠지?”

순간 해음의 동공이 확장되고 초록을 향해 움직였다. 초록은 괜스레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난 거절했어. 곧 신령이 될 나무가 갑자기 존재를 바꾸면, 반드시 대가를 치를 테니까. 그래도 자기는 상관없다고 계속 우기더라고. 그래서 결국 이 몸이 저기 위에 계신 높으신 분이랑 거래를 시도했지. 간절함이 워낙 커서 다행히 요구는 받아들여졌어. 문제는 조건이었지.”

란의 말을 숨죽여 듣고 있던 해음이 자신도 모르게 목을 삼켰다.

“백일 안에, 여자 사람 널 제외한 다른 존재들과 세 가지 연을 맺는 것. 그 연이 현세와의 연결 고리가 되어 소멸을 막아주는 거야. 단, 백일이 지나면 다시 나무로 돌아가야 해. 이번 생엔 그렇게 태어난 존재니까. 뭐, 아주 운이 좋으면 죽은 뒤엔 사람으로 환생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만약, 조건을 채우지 못하다면? 그땐, 여자 사람 네가 아까 엿들은 대로 그냥 사라지는 거야. 유에서 완전한 무로. 너와 나의 기억에서도.”

해음은 갑작스레 날라 오는 물체에 머릴 세게 맞은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곧 자책, 불안, 두려움의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한 되 뒤섞여 자신을 옥죄여 옴을 느꼈다. 또다시 소중한 존재를 죽이게 될까 봐.

“내가 해주려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나머진 너희 둘이 알아서 잘 해결해 보라고.”

란이 떠나고 해음과 초록 둘만이 남겨진 공간에 차가운 정적이 흘러넘쳤다.

‘해음아…’

초록은 어떻게든 해음과 대화를 시도해보고 싶었다. 부디 자신으로 인해 해음이 더 무너지지 않도록.

반쯤 넋이 나간 해음은 그대로 초록을 지나쳐 마당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대문을 열고 초록의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해음에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 모든 사실을 수용하고 정리할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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