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음은 산속의 한옥을 벗어나 한참을 멍하니 내려왔다. 이어 폐교 안 낡은 벤치에 앉아 초록이 있던 자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초록이 머물던 그곳엔 늦여름의 습한 공기만이 가득했다.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는데…마지막으로 인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해음은 죄책감의 바다에 잠겨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그 무렵, 어느새 초록이 다시 해음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해음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해음은 고개를 더욱 아래로 떨군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초록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해음과 자신이 존재했던 자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문득 20년 동안 한곳에 남아 해음을 그려왔던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해음을 기다리며 멈춰진 시간 속에서 계절은 한없이 반복되었다. 초록은 그 흐름에 저항하듯, 봄이면 의미 없는 꽃을 틔우고, 여름이면 끝없는 햇살을 받아냈다. 가을엔 쌓였던 고단함을 온몸으로 게워내고, 겨울엔 앙상한 몸과 마음을 차디찬 눈송이로 채워갔다.
그리움도 계절을 닮아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초록빛 싹을 틔우고 찬란히 만개하였다, 이내 절망 속으로 깊이 낙화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조그만 싹이 돋아났다. 끊이지 않는 그리움의 원 속에서 초록은 점점 무덤이 되어 갔다. 한 다발, 시든 꽃들로 형상화된 그리움 덩어리가 아래로 추락해 만든 커다란 무덤. 그 무덤은 계속해서 초록의 뿌리를 집어 삼켜갔다.
그리움의 무게에 짓눌려 서서히 숨이 멎어갈 때쯤, 기다림과 설렘의 결정체인 첫눈처럼 해음이 초록의 눈앞에 나타났다. 20년 전 그 순간처럼, 바로 이곳에. 초록은 그제야 비로소 무덤 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초록은 조심스레 다가와 몸을 낮추고 해음과 눈높이를 맞췄다. 마치 무릎을 꿇고 진심을 꺼내려는 사람처럼.
“해음아, 내가 다 미안해. 네 입장은 생각도 안 하고 사람으로 변해버려서…….”
“너 바보야?”
해음이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말문을 열었다.
“어…?”
“정말 사과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네가 하고 있어.”
초록이 가만히 해음의 모습을 응시하다 입술을 떼었다.
“너 잘못 아니야. 오로지 내 선택이었어. 최악의 상황이 온다 해도, 난 절대 후회 안 해. 그러니까 내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절대 자책하지마.”
초록의 말이 끝난 뒤 해음이 천천히 눈물로 뒤덮인 얼굴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조용히 초록을 바라보았다. 초록 또한 해음을 고요히 마주하다 얼룩진 얼굴을 찬찬히 닦아 주었다.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는 초록의 모습을 바라보며 해음은 결심하였다. 모든 운명을 넘어 반드시 초록을 지켜내리라고.
“초록아, 다 되돌려 놓을게. 네 삶만큼은.”
해음의 말에 초록은 아무 말 없이 잔잔히 미소지으며 해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둘은 함께 희미한 웃음꽃을 띄우며 서로를 응시하였다.
“그런데 넌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잘 찾아오는 거야?”
해음이 눈물을 마저 닦아내며 초록에게 물었다.
“나무들.”
초록이 서서히 무릎을 피고 일어나 해음의 옆자리에 앉았다.
“응?”
“나무들에게 물어서 찾아오는 거야.”
“그럼 혹시 나무 말고 다른 식물이랑도 대화할 수 있어?”
“어.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그냥, 문득 궁금해져서. 나에게도 누군갈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괜찮아. 함께 찾아가면 되지.”
초록이 말을 끝맺은 뒤 싱긋 미소 지어 보였다. 초록의 웃음에 해음의 마음이 조용히 일렁였다. 늪이 돼버린 바다에 잔잔한 물결이 일듯이.
“그런데 나 서울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짐들이 다 거기 있어서.”
“그럼 너…떠나는 거야?”
초록의 표정이 빠른 속도로 굳어져 갔다.
“금방 다녀올게.”
“나도 같이 가.”
“야 너, 무슨 애도 아니고-!”
해음은 떼쓰는 초록의 모습이 낯설고 귀여워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또 못 보게 되면 어떡해. 남은 시간도 별로 없는데…….”
사뭇 어두워진 초록의 얼굴을 바라보며, 해음은 초록이 진심으로 자신과 함께하길 원한다고 느꼈다.
“그래, 같이 가자. 돌아와서 그 조건인지 뭔지 빨리 해결하려면 지금 당장 가야…”
“꼬르륵-”
해음이 힘차게 벤치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 뱃속에서 요동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넌 밥부터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초록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해음을 쳐다보았다.
“나 아냐! 저기 하늘에서 나는 소리야! 또 비가 오려나…….”
해음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붉게 피어올랐다. 그때, 바짝 마르고 꾀죄죄한 몰골의 하얀색 진돗개 한 마리가 폐교 앞을 지나갔다.
“어…?”
해음의 두 눈동자가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진돗개를 쫓았다. 진돗개는 마을 변두리를 향해 힘없이 사라져갔다.
“왜 그래 해음아?”
“아…방금 지나가던 강아지가 눈에 밟혀서…….”
“여전하네. 강아지 좋아하는 건.”
“어?”
“아냐, 어서 가자.”
초록은 어린 시절 해음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몰래 웃음 지었다. 이와 달리 해음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무겁게 가라앉았다. 곧 마주해야 할 길이, 피할 수 없는 선택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