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서울(1)

by 지수

해음과 초록은 해송역에서 서울역까지 4시간을 걸쳐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해음은 내내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초록에게 부여된 조건을 어떡하면 완성할 수 있을지 홀로 해답을 찾고자 애썼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떠한 실마리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2023년 12월 5일, 백일의 순간까지 초록을 지켜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근심의 굴레 속에서 해음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들었다.

곤히 잠든 해음의 모습이 초록의 암녹색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초록의 오른손이 해음의 얼굴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곧 방향을 잃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해음이 자기로 인해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꾸만 초록의 마음을 붙잡았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해음과 거리를 두고서 그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듯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지 않을까…….

그러나 이와 같은 주저함은 끝없이 해음의 곁에 머물고 싶은 간절한 이기심으로 빠르게 상쇄되어 갔다.


“지금부터 잘 따라와야 해.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잘못하면 놓칠지도 몰라.”

기차 플랫폼 앞. 낯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멀뚱히 서 있는 초록에게 해음이 주의를 주었다. 초록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신을 파고드는 이질적인 공기와 소리에 정신을 홀린 것 같았다.

“저쪽으로 가서 지하철이란 걸 타야 해. 이런 곳이 처음이라 적응하기 힘들겠지만 …”

순간, 해음의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었다. 해음은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레 초록이 있어야 할 곳을 바라보았다.

어디에도 초록은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은 느낌이 들었다. 빠르게 지나치는 사람들, 쉴 새 없이 울리는 안내 방송, 철의 마찰음……. 그 속에 해음만이 홀로 유령처럼 서 있었다.

‘정말 다 꿈이었던 걸까. 모든 게 이곳으로 다시 혼자 보내지기 위한 무의식 속 계획이었던 걸까.

아니, 아니야…분명 현실이었어.

해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많은 인파 속을 헤쳐 지나갔다. 자신과 초록이 지나온 길을 향해 한 발 한 발 간절한 걸음을 내디뎠다. 반드시 되찾아야만 했다. 잃어버린 초록색 꿈의 조각을.

“저기…너무 맘에 들어서 그런데, 혹시 번호 좀 주실 수 있어요?”

갈급히 주변을 살펴보던 해음의 두 눈에 여자들 무리 속에 우두커니 솟아 있는 초록의 모습이 들어왔다. 해음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없는데.”

초록이 무미건조한 표정과 말투로 답했다.

“네? 아니, 핸드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지금 저 돌려 까시는 거죠?”

“오빠-!”

해음이 초록이 있는 곳으로 다급히 뛰어가 여자들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아니, 여기 있으면 어떡해! 어서 가서 약 먹어야지! 내가 말했잖아, 자꾸 이런 데서 헤매고 그러면 안 된다고. 죄송합니다! 저희 오빠 상태가 좀 안 좋아서요. 그럼 저흰 이만.”

해음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초록의 팔을 이끌고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초록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해음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상황이긴! 웬 멍청이 한 명을 여우들한테서 구해준 상황이지!”

“해음아. 너 왠지 말투가 박란을 닮아가는 것 같아.”

“초록아. 난 그 여자아이, 아니, 산신의 말투가 왜 그런지 이해가 갈 것 같아.”

해음의 말에 초록이 고개를 갸웃하였다.

“잠시 대화 가능할까요?”

불쑥, 자주색 슈트 차림의 여성이 해음과 초록의 앞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시죠?”

해음이 여자를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여자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쪽이 아니라 난 이쪽이랑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여자가 초록을 응시하며 답했다.

“죄송한데, 이쪽은…”

“나 여기 모델 에이전시 캐스팅 디렉터예요.”

여자는 해음의 말을 끊고 자신의 명함을 초록에게 건넸다. 해음은 초록의 손에 쥐어진 명함을 통해 앞에 있는 이 여성이 국내 유명 모델 에이전시 관계자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시 모델 일에 관심 없어요? 제의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그게 뭔…”

“아이고-! 이러다 약 먹을 시간 지나겠다, 오빠! 어서 가자! 죄송하지만 저희 오빠가 여기가 많이 아파서요.”

해음이 자신의 검지로 관자놀이 부분을 톡톡 건드려 보였다. 그리고 초록과 함께 불과 몇 분 전처럼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이대론 안 되겠어.”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선 해음이 무언가 결심한 듯 말을 내뱉었다.

“뭐가?”

“…따라와.”

해음은 초록의 손목을 잡고 역사 내 의류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자 잘 어울리겠다. 이걸로 주세요.”

해음이 서둘러 계산을 마친 다음 흰색 바탕과 초록색 창을 가진 볼캡을 초록의 머리 위에 씌었다.

“지금도 충분히 답답한 데…….”

4시간이 넘도록 햇빛을 보지 못한 초록이 다소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만 참아. 이게 다 네가 너무 잘…아니, 그게 아니라…어쨌든-! 이러다간 오늘 내로 우리 집에 못 갈 것 같아서 그래. 대신 내가 아이스크림 사줄게. 시원한 거 먹으면 좀 나을지도 몰라.”

“아이스크림?”

“응! 어, 저기 있다!”

해음이 이번엔 초록을 이끌고 아이스크림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맘에 드는 거로 골라봐.”

초록은 생에 처음으로 마주하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걸로 할래.”

초록이 선택한 맛은 민트 초코였다.

“굉장히 호불호 갈리는 맛인데 괜찮겠어?”

“응.”

“나중에 후회하기 없기다?”

초록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해음과 초록은 주문한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가게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넌 잘 모르겠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파로 나뉘어.”

“무슨 파?”

“민트 초코파와 반 민트 초코파.”

“어?”

”일단 한 번 먹어 봐.”

해음은 아이스크림을 살짝 떠서 초록의 입 앞에 가져갔다. 초록은 가만히 해음이 주는 아이스크림을 받아먹었다. 곧 초록의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달달 하면서도 깔끔 시원한 두 맛의 조화가, 초록의 눈동자를 깊은 환희로 반짝이게 만들었다.

“뭐지? 이 엄청 감동한 눈빛은?”

해음은 아이스크림을 처음 맛본 아이 같은 초록의 모습을 지켜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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