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서 짐 챙겨 나올게. 쉬고 있어.”
오후 4시경. 기나긴 시간 끝에 둘은 함께 해음의 서울 집에 도착했다. 집 안은 누구도 머물지 않았다는 듯 적막했다. 온기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여름이란 계절 속에 한겨울의 사늘함만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자리하고 있었다.
주방 안 새하얀 식탁 위엔 초록이 20년간 볼 수 없었던 해음의 모습들이 액자 속에 전시되어 있었다. 초록은 씁쓸히 미소 지으며 사진 속 순간들을 찬찬히 두 눈에 담았다.
‘내가 널 놓친 시간 속에서 넌 이런 모습이었구나…….’
문득, 가장자리 액자 옆에 놓인 파란색 약통이 초록의 시야를 붙잡았다. 약통엔 ‘신경 안정제’라는 다섯 글자가 해음의 글씨체로 크고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반복적으로 뻗치는 죽음의 손길을 단 몇 초라도 빠르게 밀어내기 위한, 해음만의 절박함이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초록은 해음이 이곳에서 홀로 보내야 했던 수많은 밤을 헤아려보았다. 전등이 꺼진 채 어둠에 잠긴 거실, 땀으로 젖어든 축축한 살결, 희미하게 남겨진 약 냄새……. 모든 장면이 해음이 견뎌온 밤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초록은 그 시간 동안 함께할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며, 마음이 차디찬 눈보라 속에 내려앉듯 한없이 시려졌다. 깊게 밀려오는 감정의 파동 속에서 초록은 그저 주먹을 꼭 쥔 채 애써 거실로 발길을 돌렸다.
곧, 영정 사진 속 해음의 어머니가 밝은 미소로 초록을 맞이했다. 서서히 굳었던 몸이 이완되고, 20년 전의 짧았던 만남이 스르르 떠올랐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했던 그 순간을 회상하며, 초록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2003년 4월의 어느 날. 초등학교 4학년이 된 해음이 초록에게 기대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초록은 해음이 그늘에서 편히 잘 수 있도록, 잎사귀로 스며드는 햇빛을 온전히 받아냈다.
봄 햇볕 속 둘만의 시간이 이어지던 그 순간, 해음의 어머니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해음과 초록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해음의 어머니는 잠든 해음의 곁에 앉아 해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초록을 잔잔히 올려보다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우리 해음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해음의 어머니가 다정히 미소 지으며 초록을 쓰다듬었다. 이어 봄꽃 향을 머금은 싱그러운 바람을 마주한 채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해음은 입고 있던 옷을 서둘러 갈아입고, 빠르게 짐을 챙겨넣었다. 그러다 우연히 1년 전 스스로 떠났던, 이전 회사의 짐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해음의 머릿속은 동의도 없이 악몽 같던 시간을 제멋대로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이거 해음씨 업무 진행하면서 처리하면 더 효율적일 것 같은데, 하는 김에 같이 좀 맡아주라.”
“좀 손해 보는 것 같더라도 해음씨가 더 해봐. 덕 쌓는다 생각하고. 나중엔 그게 다 자기 복으로 돌아간다?” “업무 분장을 새로 해달라고? 자기 지금 나한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 경고감이고 징계감인 거 몰라? 더군다나 업무 분장 관련해서 들고 온 이 자료들은 나한테 전혀 신빙성이 없어.”
“원래 직장은 그런 곳이야. 그러니까 너한테 월급이 나오지.”
“어머, 우리가 정신이 없어서 점심때 해음씨를 못 챙겼네. 미안해.”
“해음씨. 어제 우리끼리 모임을 가졌는데, OO씨가…….”
“글쎄, 난 이 업무 잘 모르겠으니까 나한테 들고 오지 마. 알아서 좀 해결해.”
“오빠라고 부르면서 부탁 좀 해봐. 혹시 알아? 그러면 들어줄지.”
“에이, 그런 일 생기면 해음씨가 알아서 하겠죠. 우리가 뭘 어떻게 해요.”
“무슨 일 처리를 이런 식으로 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동안 이런 식으로 일해 왔어? 정말 실망이다, 해음씨.”
“뭐? 우울증이랑 공황장애? 그런 게 왜 생겼지. 자기 성격이 원래 그런가.”
해음은 끊임없이 재생되는 그날들의 목소리에 돌연히 침몰해 갔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손끝이 저려 왔다.
‘괜찮아, 박해음. 여긴 안전해. 위험한 건 하나도 없어. 정신 차려.’
해음이 간신히 의식을 붙잡은 채 캐리어를 들고 방문을 나섰다.
“짐 다 챙겼어?”
“응.”
“너 또 어디 아파? 얼굴도 창백하고…….”
해음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초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괜찮아.”
해음의 시선이 천천히 엄마의 영정 사진으로 향했다. 곧 미칠 듯한 불안감과 질식감이 해음의 정신과 육체를 지배했다. 해음은 저항 없이 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이어 가슴을 움켜쥔 채 무의식적으로 가쁘고 거친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또다시 해음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해음아, 왜 그래! 정신 좀 차려봐, 해음아!”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 갇힌 해음에게 초록의 목소리는 닿지 못하고 아득히 멀어져 갔다. 초록은 어쩔 줄 몰라하며 해음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해음아-!”
의식의 끝자락, 막다른 차원에서 울려오는 초록의 목소리가 해음의 존재를 다시 현실로 불러오고 있었다.
“약…약 좀…….”
해음이 겨우 정신을 붙잡은 채 간신히 소리 내어 말했다.
“어? 어, 잠시만!”
초록은 급히 식탁 위 파란색 약통을 해음에게 건넸다. 해음은 떨리는 손으로 알약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초를 세기 시작했다. 진절머리 나는, 숨 막히는 밤이 부디 빨리 잠들길 바라면서.
‘일초…이초…삼초…’
초록은 아무 말 없이 해음의 모습을 안아주었다. 지금 초록이 해음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조용히 자신의 온기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함께 어둠의 터널을 지나길 바라면서.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해음아.’
잔잔히 스며드는 나무 향 속에서 해음은 천천히 봄날의 햇살을 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