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서울(3)

by 지수

다소 시간이 흐른 뒤, 해음은 정신을 가다듬고 초록의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해음은 이토록 쉽게 부서지는 나약한 자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다. 아직도 과거 속을 걷는 매 순간마다 새롭게 무너지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간이 인간에게 주는 무뎌짐이란 축복이 자신만을 빗겨 선사되는 것만 같았다. 왜 여기서 조금도 더 단단해지지 못하는 걸까.

분명, 그때의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멈춰 선 자신을 흘러가게 만들 수 있는 첫 번째 해답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음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해음은 그때의 자신과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보편적인 치유의 방식마저 자신의 안위를 위한 가증스러운 행위로 와닿을 뿐이었다.

“나 때문에 많이 놀랐지? 미안해…….”

해음이 한층 어두워진 표정과 목소리로 초록에게 말했다.

“해음아. 네가 어떤 순간에 있든 나에게 넌 늘 똑같아. 그러니까 그런 감정 가지지 않아도 돼. 그리고…내가 더 미안해. 힘이 되어주지 못해서…….”

“아니야, 초록아. 정말…정말 고마워. 과거에도, 지금도 함께 있어 줘서.”

해음이 초록을 바라보며 애써 미소 지었다. 초록은 해음을 마주하며 나직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부턴 내가 다 알아줄게. 혼자서 모두 감당하게 두지 않을게. 다음에 또 깜깜한 터널 속을 헤매야 할 순간이 찾아오면, 제발 사라지지 말고 언제든 나한테 기대 줘. 내가 네 곁에서 터널 끝까지 함께 걸어갈게.”

초록이 따스히 해음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 손길에 해음은 입술을 다문 채 고요히 초록을 응시하였다. 은은히 빛나는 암녹색 눈동자 너머로 문득 흑백으로 물든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없어질지 모르는, 그리고 없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초록의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초록빛이 건네는 안위에 감당할 수 없이 길들여졌다, 마침내 미래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결국 어떠한 빛에도 닿지 못한 채 또다시 부서질 것이다. 길들여진 만큼 산산이.

“어머니 사진 보는 거…많이 힘들어?”

초록이 해음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실…아까 방에서 안 좋은 기억들이 계속 떠올라서 힘들었거든. 그런데 엄마 사진까지 보게 되니까 정말…….”

해음이 말을 잇지 못한 채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초록은 조용히 해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초록아.”

해음이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목이 멘 소리로 초록의 이름을 불렀다. 초록은 덤덤히 해음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어 놓았다.

“응, 해음아.”

“우리 엄마, 나 때문에 돌아가셨어. 1년 전에.”


2022년 8월 20일 수요일, 아침 7시 50분. 해음이 엄마와 함께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해음은 시리얼을 깨작거리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나 직장 그만둘까?”

“딸아. 하루를 시작할 땐 긍정적인 얘기부터 하자, 응? 그리고 아침부터 밀가루 먹지 말고 밥 먹어. 그래야 기운이 나지.”

“…나한테 안 맞는 것 같아, 지금 직장.”

“맞아서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다들 참으면서 다니는 거지. 나도 그렇고.”

“엄마, 사실 나…회사 적응하는 게 너무 힘들어.”

“나이 삼십 먹고 아직까지 적응 못 해서 힘들면 어떡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한참인데.”

“엄만 딸이 힘들다는데 그런 소리밖에 못 해?”

“뭐…?”

“힘들다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들다고!”

“얘가 아침부터 왜 이렇게 소릴 질러.”

“나 정신과 약 먹으면서 회사 다녀. 엄만 나 이상한 거 못 느꼈어?”

“해음아…”

“됐어, 엄마랑 더 이상 얘기하기 싫어.”

해음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의자에 매여있던 가방을 집어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오늘 아침, 해음의 원망은 무너져버린 세상이 아닌 무너져버릴 엄마에게 향하고 있었다.

“오늘 늦은 오후부터 태풍의 영향권에 접어들면서 많은 비가 쏟아지겠습니다. 다들 출근하시기 전에 우산을 꼭 챙기시길 바랍니다.”

해음이 문을 닫고 나간 순간, TV에선 오늘의 날씨가 흘러나왔다. 해음의 엄마는 멍하니 현관에 걸린 해음의 초록색 우산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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